89명 여성들의 몸과 옷에 관한 인터뷰집 ‘몸과 옷’
“뚱뚱한 다리로 짧은 바지를 입고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다고 누구도 나를 욕할 순 없어요. 나 자신도 나를 욕할 순 없어요. 왜냐면 나는 그냥 나니깐.”
유예빈
89명의 여성이 카메라 앞에 섰다. 나이도, 스타일도, 직업도 다양한 이들이 한데 모인 이유는 자신의 ‘몸’과 ‘옷’에 얘기하기 위해서다. 책 '몸과 옷'은 89명 여성들의 '몸과 옷'에 대한 생각을 그들의 사진과 함께 기록한 인터뷰집이다. ‘몸과 옷’의 기획자인 김지양씨는 19일 한국일보와의 통화에서 “내 마음대로 입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원하는 대로 입으라는 메시지를 이 책을 통해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국내 최초 플러스 사이즈 모델로, 2014년부터 “평균보다 큰 체형의 사람들을 위한” 패션 문화 잡지 ‘66100’을 만들어왔다. 한국 기성복의 한계로 여겨지는 여성 66사이즈와 남성 100사이즈에서 이름을 따와 44사이즈 추종문화에 반기를 들겠다는 취지였다.
그런데 잡지를 만들다 보니 옷으로부터 소외되는 게 단순히 플러스 사이즈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들보다 왜소해서, 성소수자라서, 학생이라서, 노인이라서, 갖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입지 못했다. 더 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그렇게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총 89명의 여성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은 결과물인 '몸과 옷'이 탄생했다.
가능한 한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고자 했는데, 인터뷰 지원자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게 이 다양성을 배반하는 일이 일어났다. 성별 제한을 두지 않았는데도 14세부터 75세까지 135명의 지원자가 모두 여성이었다. 김씨는 “인터뷰에 나선 분들은 뭔가 ‘불편함’을 느낀 건데, 남자들의 경우 이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는 뜻”이라며 “이 사회가 몸과 옷에 있어 특히 여성에게 많은 것을 강요하고 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결과”라고 분석했다.
난생 처음 카메라 앞에 서서 자신을 드러내봤다는 지원자부터, 남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는 지원자까지. 여성들 각각의 사연은 다양했지만 공통점은 모두 자신의 몸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가진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스타일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된 인터뷰는 종래에는 몸을 둘러싼 체념과 분노, 고통과 서러움에 관한 고백으로 이어졌다.
특히나 신체 사이즈와 상관없이 거의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다이어트 경험이 있었고, 그중 섭식장애를 겪은 이도 적지 않았다. 반복적으로 수신된 신체에 대한 주변인들의 부정적 메시지는 자기혐오로 이어졌다. 김씨는 이에 대해 “하루 빨리 차별금지법이 제도화되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자기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건, 결국 이 사회가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예요. 생존하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살 수밖에 없는 거죠. 차별금지법이 제정되면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도 안전하다고 느낄 테고, 자연히 좀 더 자신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게 되겠죠.”
2014년 김씨가 처음 66100을 발간했을 당시와 비교하면 요즈음 신체 다양성은 비교적 확보된 것처럼 보인다. ‘보디 포지티브(자기 몸 긍정주의)’가 패션업계의 최신 트렌드로 떠올랐고 글로벌 의류 브랜드들은 앞다퉈 시니어 모델과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기용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거식증을 동경하는 ‘프로아나’ 문화가 10대 여성 청소년들 사이에 퍼지고, 고강도 운동과 식이제한을 통해 만든 몸을 사진으로 남기는 보디 프로필이 열풍이다.
김씨는 “예전에 비하면 확실히 변화가 느껴지지만, 동시에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도 든다”며 “내 꿈은 내가 필요 없어지는 세상”이라고 말했다. “너무나 당연하게 다양성이 인정받는 날이 오면, 제가 할 일이 없어지겠죠. 그런 날이 꼭 오기를 꿈꿔요. 다만 그 전까지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당신 뒤에 ‘66100’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원하는 대로 입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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