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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가해자 불러다 "조심해"… '비밀 유지' 외면한 2차 가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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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 가해자 불러다 "조심해"… '비밀 유지' 외면한 2차 가해였다

입력
2021.08.19 04:30
수정
2021.08.19 09:16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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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피해자 '정식 신고 원치 않는다'?
조치없이 가해자에 주의 준 상사 입건?
'고충상담원과 연계'가 상사의 역할

상사의 성추행 피해 신고 후 숨진 채 발견된 해군 중사 빈소가 마련된 대전 유성구 국군대전병원에서 14일 근조 화환을 실은 화물차가 출입 허가 후 정문을 지나고 있다. 대전=연합뉴스

상사의 성추행 피해 신고 후 숨진 채 발견된 해군 중사 빈소가 마련된 대전 유성구 국군대전병원에서 14일 근조 화환을 실은 화물차가 출입 허가 후 정문을 지나고 있다. 대전=연합뉴스

'성추행 피해 해군 부사관 사망사건'과 관련해 성폭력 가해자에 이어 최초 신고를 받았던 A 주임상사도 비밀보장 위반 혐의로 입건되자, 성추행·성폭력 사건을 접하게 된 중간 관리자들에 대한 교육이 더 강화돼야 한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해군 설명을 종합하자면, A 상사는 피해자로부터 성추행 사실을 최초 보고받았지만, 정식 신고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에 별다른 조치 없이 가해자에게 '주의'를 줬다. 이에 대해 A 상사는 별달리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억울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성추행, 성폭력 사건에서 A 상사의 행동은 금기사항에 속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한 행동이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2차 가해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동지침' 매뉴얼 있는데… 무시한 해군

18일 여성가족부에 따르면 A 상사가 저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했는지는 여가부가 각 공공기관으로 내려보내는 성희롱·성폭력 처리 매뉴얼에 고스란히 적혀 있다. 성폭력 판단 기준 등과 함께 피해 사실 인지 후 대응 방식이 기관장, 관리자, 동료 등 역할에 따라 정리돼 있다.

여가부는 공공기관의 성희롱·성폭력 예방 시스템을 매년 점검하며, 시스템 마련에 참고하도록 상황이나 직책에 따른 대응 매뉴얼도 제공하고 있다. 여가부 제공

여가부는 공공기관의 성희롱·성폭력 예방 시스템을 매년 점검하며, 시스템 마련에 참고하도록 상황이나 직책에 따른 대응 매뉴얼도 제공하고 있다. 여가부 제공

우선 주임상사와 같은 '상위관리자'가 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은 '고충상담원에게 연계'다. 그 이전에 신고 사실은 가해자는 물론 제3자 등 그 어느 누구에게도 누설해서는 안 된다. 자의적으로 아마 이런 거 아니겠냐고 판단하거나,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 불쑥 끼어들어 사적 조언이나 충고를 하는 것도 금물이다.

보통 관리자들이 흔히 하는 실수 중 하나가 가해자에게 주의를 준답시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피해자나 사건에 관해 의도치 않게 정보를 주는 경우가 있다고 매뉴얼은 분명히 경고해뒀다. 상위관리자가 할 일은 그저 피해 상황을 경청하고 공감하며 기관 내 고충처리절차에 필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 딱 거기까지다.

피해자가 '정식 신고는 않겠다'는 뜻을 밝힌 것을 A 상사가 '고충상담원 연결도 거부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면, 그 또한 A 상사의 자의적 해석일 뿐이다. 고충상담원을 만나는 것과 '정식 신고'는 다른 개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고충상담원을 통하더라도 사과나 재발 방지 약속 등 얼마든지 비공식 중재 및 합의를 진행할 수 있다고 매뉴얼은 분명히 명시해뒀다.

공공기관 성희롱 및 성폭력 사건 발생 시 관리자의 역할을 도식화해 정리한 자료. 여가부 제공

공공기관 성희롱 및 성폭력 사건 발생 시 관리자의 역할을 도식화해 정리한 자료. 여가부 제공


"비밀 유지" 호소 외면하는 2차 가해

이번 사건은 비밀 유지가 피해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이해하는 성인지 감수성 부족의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냈다는 지적이다.

이화여대 산학협력단이 2015년 말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한 2차 피해 관련 연구용역보고서를 봐도 이는 확연하다. 이 보고서는 민간기업, 공공기관 등 근로자 450명을 대상으로 2차 피해에 대한 심각성 수준(5점 만점)에 대해 설문 조사를 했는데, '비밀 보장 소홀(또는 신상 공개)'이 3.36점으로 '가해자로부터 고소나 협박(3.32점), 해고 등 고용상 불이익(3.14점), 문제유발자나 왕따로 낙인(3.12점)보다 훨씬 더 큰 공포였다.

매뉴얼을 구성원에게 제대로 흡수시키는 건 교육뿐이다. 여가부 매뉴얼을 바탕으로 각 기관은 자체적 교육을 진행하고 교육실적을 여가부에 보고한다. 하지만 교육 내용을 일일이 다 확인할 수는 없다. 여가부도 가장 교육이 시급한 대상을 추리다보니 기관장 등 고위직 인사들에 대한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일선 중간 관리자에 대한 교육부터 더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여성인권진흥원 관계자는 "고충처리도 강제할 수는 없기에 '철저한 비밀 보호 아래, 당신이 바라는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고 최소한 알려는 줘야 하는데, 그런 것 하나 없이 가해자를 불러 혼내는 건 그냥 바로 사건을 누설한 것과 다르지 않다"며 "고충상담원보다 심리적으로 가까운 부서장, 관리자에게 털어놓는 피해자가 대다수라 그들을 위한 철저한 교육 없이는 이런 문제가 계속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맹하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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