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터뷰]
이케다 에리코 ‘여성전쟁평화자료관(wam)’ 명예관장?
"위안부 문제는 다음 세대로 기억 잇는 긴 싸움"
"우리가 모은 자료나 증거, 다음 세대에 넘겨줄 것"
"일본의 가해를 반성하는 지성 가진 정치인 나와야"
“김학순씨가 증언하는 집회에 가면 사람들이 정말 빽빽히 많았습니다. 청중 다수가 여자들인데 흐느끼고 오열하고…. 다들 눈물로 그 괴로운 이야기를 들었지요. (오키나와에서 생을 마감한) 배봉기씨처럼 직접 대면 인터뷰를 하지는 못했지만, 김씨가 일본 사회에 준 충격은 엄청났습니다.”
오는 14일은 고(故)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세상에 최초로 공개 증언한 30주년이다. 일본의 시민운동가들도 관련 행사 준비로 분주하다. 일본 내 유일한 위안부 및 전시 성폭력 관련 자료관인 ‘액티브 뮤지엄-여성들의 전쟁과 평화 자료관(wam)’을 이끄는 이케다 에리코(池田?理子·71) 명예관장이 대표적이다. 그는 2000년 12월 도쿄에서 쇼와(昭和·히로히토) 일왕 등을 전범으로 지목, 유죄판결을 내린 '여성국제전범법정'(여성법정) 행사의 주역이다.
그는 지난 9일 도쿄 신주쿠구 소재 자료관에서 진행된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로 대치하는 한일 관계를 놓고 "긴 싸움이므로 다음 세대로 기억을 잇는 게 중요하다"며 "우리가 모은 자료나 증거를 계속 기록하고 다음 세대에 넘겨주면서 동시에 지금의 일본 정부를 바꾸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특히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대해 "당시 피해자들의 견해를 듣지 않고 미국의 압력 등으로 인해 양국 정부끼리 멋대로 만든 것"이라며 "약간의 돈으로 영원히 끝내버리자는 목적이었는데,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는 역사를 제대로 돌아보고, 일본이 해온 가해를 제대로 반성할 수 있는 지성과 능력을 가진 정치인이 나와야 해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케다 명예관장은 '그러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겠냐'는 질문에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은 포기해선 안 된다고 했다"고 강조하며 "식민지 지배나 국가가 저지른 인권침해, 전쟁 가해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국가와 싸워 바꿔가는 데 몇 년이 아니라 몇십 년, 몇 세기가 걸릴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30년 전 김학순 증언의 파장이 컸던 이유에 대해 “‘내 말을 들어라. 진실을 부정하지 말라’라고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기 때문”이라며 “현재 미투 운동의 원조가 위안부 증언이란 말도 있듯이, 역사적인 사건이었다”고 평가했다. 김학순 증언은 아시아 각지의 숨어 있던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 과거를 밝히고 일본 정부에 잇따라 소송을 제기하는 기폭제가 됐다.
여성법정 개최 당시 세계 각국의 법률가들이 법관과 검사, 변호사 역할을 맡고 한국은 물론 아시아 각지의 피해자가 원고단으로 참여했다. 30여 개국 기자 수백 명이 취재해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일본 언론은 냉담했고 NHK는 처참한 왜곡 보도를 내보냈다. 기소 사실과 판결문 등 핵심 내용을 소개하지 않은 것이다. 당시 NHK PD였던 이케다 명예관장은 아사히신문 마쓰이 야요리 기자와 함께 NHK에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자 당시 프로그램 데스크가 아베 신조 전 총리(당시 관방부장관) 등 정치권의 압력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이케다 명예관장은 “아베는 직접 후지TV에 출연해 북한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고 했다”면서 프로그램 화면 사진을 보여줬다. “마쓰이씨와 내 이름도 크게 적혀 있는데, 우리가 북한의 스파이라는 명예훼손적 주장이지요.” 내부 고발 덕분에 항소심에선 이겼지만, 대법원에서 뒤집혀 이 사건은 원고 패소로 끝나게 됐다.
2010년 NHK에서 정년퇴임하고 자료관 관장이 된 이케다씨는 2018년 명예관장으로 한발 물러났다. 요즘은 일본 활동가들이 한국의 ‘수요 시위’에 호응해 매월 셋째 주 수요일에 도쿄 신주쿠역에서 개최하는 ‘수요 행동 in 신주쿠’ 시위에 항상 참가한다. 김학순의 사진을 붙인 플래카드를 목에 걸고 전단을 나눠주면, 관심을 보이는 외국인이 있지만 일본인은 예외 없이 차가운 반응이라고 한다.
이케다 명예관장은 “그럴 때마다 ‘지금의 이런 정치를 승인해 버린 우리가 값을 치르고 있구나’라고 생각한다”면서 “포기하지 않고 호소할 수밖에 없다. 입을 다문다면 그들(우익)이 가장 원하는 바일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일본내 10건의 소송에서 원고가 모두 패소한 게 ‘여성법정’을 추진한 배경인가.
“그렇다. 저널리스트로서 존경하는 선배였던 마쓰이 야요리 아사히신문 기자가 이를 안타깝게 여겨 1998년 당시 NHK PD였던 나에게 여성법정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가해국 일본의 여성으로서 우리가 무엇이라도 하자”고 제안했다. 2000년 12월 법정이 개정하기 2개월 전에는 자주막하출혈로 쓰러져 죽을 고비를 넘겼을 정도로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했다. 특히 중국에서의 위안소 이용과 민간인 성폭행 등 자신의 전시 성폭력 범죄 행위를 반성하며 증언한 병사 증인의 섭외가 가장 어려웠다.”
-아베 당시 관방 부장관은 어떻게 대응했나.
“내부고발로 궁지에 몰리자 아베가 직접 후지TV에 출연해 재판에 대해 억지 주장을 펴면서 ‘북한이 날 겨냥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프로그램 사진을 보면 마쓰이 씨와 내 이름이 크게 적혀 있는데, 우리가 북한의 스파이라는 명예훼손적 주장이다. 내부 고발 덕분에 항소심은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으나 대법원에서 뒤집히고 말았다. 이후 2011년까지 NHK는 위안부 관련 프로그램을 전혀 제작하지 않았다.”
-NHK가 왜 위안부 프로그램을 제작하지 않게 되었나.
“나는 NHK PD로서 ‘무라야마 담화’가 나왔던 1995년과 이듬해 NHK에서 위안부 관련 프로그램을 7편이나 연출했다. 하지만 이미 97년부터 위안부 프로그램 기획안이 전혀 통과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시민 활동으로서 소형 캠코더를 들고 다니며 피해자 증언 영상을 만들었다. 나중에서야 97년이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발족하고 아베 신조 당시 의원이 사무국장을 맡은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이 창설된 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수의 정치인을 배출한 우익 단체 ‘일본회의’가 창설된 것도 이때다. 이때부터 NHK의 ‘3대 터부’가 시작됐는데, △난징대학살 △쇼와 일왕의 전쟁 책임 △위안부 문제다. 아무리 특종에 가까운 소재를 찾아도 이 세 가지에 대해서는 못 만든다.”
-여성법정 이후 위안부 자료관 설립을 주도했는데.
“마쓰이 선배가 2002년 담관암 선고를 받았는데 그해를 넘기지 못했다. 나에게 ‘일본군 위안부 자료관을 설립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신의 전재산과 소장 자료를 기부했다. 이에 자료관 건설위원장을 맡아 3년 동안 준비해 2005년 8월에 wam을 개관했다. 당시에는 NHK 소속이어서 2010년 정년퇴임 후에 관장으로 취임했다. 2018년부터는 명예관장으로 한발 물러나, 그동안 찍어 둔 영상자료를 편집, 디지털화해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을 기록하며 오랫동안 만나왔는데 느낀 점이 있다면.
“한국뿐 아니라 아시아 각지에서 위안부 피해자들을 만났는데 공통점이 있다. 전시 성폭력으로 트라우마를 갖게 됐지만 다른 분들의 증언을 보거나 격려를 받으면서 점차 자존감을 회복하고 목소리와 눈빛이 달라져 가는 걸 목격했다. 대만 할머니들은 처음에 법정 투쟁을 할 때도 원고A, 원고B 하는 식으로 익명을 썼다. 그런데 김순덕 등 한국 할머니들이 ‘왜 얼굴을 가리고 이름을 숨기느냐. 나쁜 건 일본군이지 우리가 아니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걸 봤다. 점차 태도가 변하더니 나중에 대만 할머니들도 본명으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활동 과정에서 우익 단체에 곤욕을 치른 적은 없었나.
“아직 NHK에 다니고 있을 때 어머니 집에 남자들이 잔뜩 찾아와서 ‘이케다를 내놓으라’고 한 적이 있었다. 협박장을 받고 잠시 집에 들어가지 않는 날도 있었다. 여성법정 때도 물론 방해한다, 폭파한다든가 하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 다행히 실제 행사 때는 가두 선전 정도에 그쳤다. wam 설립 때도 폭파 예고가 있었고, 화약 가루 같은 것이 든 편지가 온 적도 있다. 경찰에 신고했지만 아무도 잡히지 않았다. 우익단체인 재특회에서 사람들을 끌고 온 적도 있지만 그런 물리적 습격은 한 번에 그쳤다. 기차역 승강장을 걸을 때도 혹시 떠밀리지 않도록 걷는 위치를 조심한다든지 하면서 살아 왔다. 정치권이 이들을 뒷받침하면서 이들이 너무 당당해졌다.”
-위안부 문제가 다 해결되려면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나.
“2017년 11월 서울에서 열린 ‘유네스코 등재 국제연대위원회’ 회의에서 한 일본 활동가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일본의 상황을 바꿀 수 없다. 때로는 정말 절망적인 기분이 든다’고 말한 적 있다. 그런데 기조연설을 했던 나비 필레이 당시 유엔인권고등판무관은 그렇다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식민지 지배나 국가가 저지른 인권 침해, 전쟁 가해 같은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국가와 싸워 바꿔 가는 데는 몇 년이 아니라 몇십 년, 몇 세기가 걸릴 수도 있다고 했다. ‘호주가 원주민 탄압을 인정하는 데 200년 가까이 걸렸지 않느냐. 쉽게 되지 않지만 항상 문을 두드리는 심정으로 해야 한다’라고 말해 주었는데 크게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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