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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김연경을 만든 건 팔 할이 '눈물 젖은 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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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김연경을 만든 건 팔 할이 '눈물 젖은 빵'이다

입력
2021.08.06 16:16
수정
2021.08.06 16:46
3면
0 0

학창 시절 만년 후보일 때 기본기, 시야 길러
공격, 수비 겸비한 세계 최고 선수로 성장
도쿄올림픽 메달만 바라보고 구슬땀

김연경이 지난 4일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 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8강전 터키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뒤 환호하고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김연경이 지난 4일 도쿄 아리아케 아레나 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8강전 터키와의 경기에서 승리한 뒤 환호하고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10억 중 단 하나의 스타.'

지난 4일 2020 도쿄올림픽 여자배구 8강에서 한국이 터키를 꺾은 뒤 국제배구연맹(FIVB)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이다. 세계 최고의 여자 배구 선수인 김연경(33·상하이)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말인 듯하다.

김연경이 이런 찬사를 듣는 건 공격력만 뛰어나서가 아니다. 그는 리시브와 디그(상대 공격을 받아내는 일) 등 수비력에도 일가견이 있다. 이번 도쿄올림픽에서도 김연경은 115점으로 전체 공격 2위고 디그 4위, 리시브 8위로 전 분야에 걸쳐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처럼 김연경을 만능 선수로 키운 건 배구 코트가 아니라 벤치다.

그는 만년 후보였다

"쉬는 동안 키 좀 크고 있어라."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김연경이 가장 많이 들은 말이다. 지금은 192㎝의 장신이지만 학창시절 또래보다 작은 키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주전은커녕 교체도 가뭄에 콩 나듯 했다.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는 다른 종목으로의 전향까지 진지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당시 그가 가장 유력하게 떠올린 종목은 축구였다고 한다.

후보 선수였던 긴 시간 동안 그가 필사적으로 찾은 살길은 기본기를 익히는 것이었다. 공이 오는 곳을 파악하는 눈썰미를 기르고 안정된 서브와 수비력으로 신체적인 약점을 보완하자는 것이었다.


김연경이 2005년 10월 한일전산여고를 졸업하고 여자 프로배구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로 흥국생명에 지명된 뒤 황현주 당시 감독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연경이 2005년 10월 한일전산여고를 졸업하고 여자 프로배구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로 흥국생명에 지명된 뒤 황현주 당시 감독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년 시절 김연경의 훈련은 동이 트는 새벽부터 시작해 저녁까지 쉴 틈 없이 이어졌다. 하루는 김연경의 어머니가 "키가 저렇게 작으니 지금이라도 배구를 그만둬야 하는 것 아니냐"고 감독에게 상담한 적이 있다. 당시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연경이 어머님, 오전 훈련 끝나고 점심 먹잖아요. 그때 애들 쉬는 시간이 있어요. 다들 새벽부터 일어나서 달리고 훈련하면 말도 못 하게 지쳐요. 점심 먹고 나면 배도 부르겠다, 그 사이 낮잠을 자요. 근데 체육관에서 공 소리가 나서 누구지 싶어 가보면 연경이에요. 작은 데도 아주 독한 구석이 있어요. 저렇게 하는데 뭐라도 해내겠다 싶어요."

김연경은 공이 자신의 몸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질 때까지 연습을 했다. 또한 그가 경기 중 벤치에서 몰두한 일 중 하나가 경기 분석이었다.


5일 일본 시오하마시민체육관에서 열린 배구 국가대표팀 훈련에서 김연경이 선수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5일 일본 시오하마시민체육관에서 열린 배구 국가대표팀 훈련에서 김연경이 선수들과 대화를 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지금이야 모든 선수들이 경기 분석을 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경기를 복기하고 분석해야 한다고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김연경은 교체 선수로 시간을 멍하니 보내는 대신 눈에 불을 켜고 선수들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코트 안에 있으면 상대 선수와 너무 가까워 특징이나 전술을 파악하기 힘들다. 또 정신 없이 경기하다 보면 상대 특징을 볼 틈도 없다. 김연경은 코트 밖에서 자연스럽게 관찰력을 길렀다. 벤치는 경기 흐름을 읽는 시야를 넓혀주는 좋은 스승이었다. 상대 공격 지점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동료들에게 말해주는 능력은 바로 이때 길러진 것이다.

'왜 키가 안 클까' 푸념하는 대신 '이 키로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김연경. 그는 한일전산여고에 진학하면서 키가 쑥쑥 자라며 비로소 빛을 봤다. 후보 시절 쌓아놓은 탄탄한 기본기 덕에 수비력을 갖춘 최고의 공격수로 거듭난 것이다.

노력은 재능을 이긴다

노력이 재능을 이긴 사례는 수없이 많다. 한국 축구대표팀 부동의 왼쪽 수비수였던 이영표(44·강원FC 대표이사)도 좋은 본보기다.

이영표는 고등학교 때 순발력과 체력을 기르려고 하루에 1,000개씩 줄넘기를 했다. 처음엔 100개씩 끊어서 10세트를 채웠는데 어느 순간 2단 뛰기 1,000개를 한 번에 할 수 있게 됐다. 100개를 뛰고도 쉰 것이 아니다. 다음 100개를 뛰기 위해 숨 고르기 차원에서 줄넘기를 계속하면서 10세트를 마쳤다고 한다. 매일 정규 훈련을 끝내고 혼자 줄넘기에 땀을 쏟았다.

그가 얻은 건 필드 위에 떨어진 '주인 없는 공'을 가장 먼저 점유할 수 있는 순발력과 체력이었다. 이영표는 "어느 순간 드리블에 잔재주를 부릴 필요가 없어졌다. 공을 차고 지나쳐 가면 수비수들이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올림픽 축구대표팀 시절의 이영표. 한국일보 자료사진

올림픽 축구대표팀 시절의 이영표. 한국일보 자료사진


물론 피나는 노력이 당장 결과물을 담보하는 건 아니다.

이영표는 건국대 4학년에 올라갈 즈음 주장이 됐다. 건국대에는 올림픽 국가대표가 6명 있었다. 5명은 이영표와 동기, 1명은 후배였다. 주장임에도 국가대표가 아니었던 이영표는 열등감과 패배감에 마음이 복잡했다고 밝혔다.

그해 겨울 이영표는 폭발했다.

"날씨가 추워지니 개인훈련을 나오는 선수들이 없었어요. 저 혼자 땀 뻘뻘 흘리며 개인운동을 하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죠. '다른 친구들은 따뜻한 숙소에서 쉬고 있겠지? 지난 10년간 내가 했던 노력은 뭐지? 나처럼 재능 없는 사람은 아무리 해도 안 되는구나.' 노력한 시간이 억울해 펑펑 울었어요."

그러나 노력하는 자에겐 역전의 기회가 오기 마련이다. 그렇게 절망의 시간을 보내고 몇 주 뒤 올림픽 대표팀의 한 선수가 다치는 바람에 이영표에게 테스트 기회가 왔다. 결과는 '합격'. 그 후 이영표는 1999년 6월 처음으로 국가대표에 발탁됐고 2011년 은퇴할 때까지 국가대표에서 단 한 번도 주전을 뺏긴 적이 없다.

도쿄올림픽만 본다

"아시아 1위라는 말은 들었지만 세계 1위는 못 들어봤다. 그 말을 듣고 싶다."

김연경은 2011년 5월, 세계 최고로 꼽히는 터키 프로배구 페네르바체 입단을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건방져 보일까 걱정된다"면서도 "까짓것, 한 번 도전해 보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김연경은 공언대로 세계 여자 배구를 평정했다. 그는 한국(흥국생명), 일본(JT마블러스), 터키(페네르바체)에서 모두 우승하는 진기록을 세웠고 모든 리그에서 최우수선수(MVP)를 한 번 이상 거머쥐었다. 연봉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다.

배구 선수로서 영광을 고루 맛 본 그가 못 이룬 꿈이 올림픽 메달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 3, 4위전에서는 '숙적' 일본에 패했고 2016년 리우올림픽 때는 8강에서 고배를 들었다.


일본 시오하마시민체육관에서 열린 배구 국가대표팀 훈련에서 김연경이 집중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일본 시오하마시민체육관에서 열린 배구 국가대표팀 훈련에서 김연경이 집중하고 있다. 도쿄=연합뉴스


2018년 여름 진천선수촌에서 김연경을 인터뷰했을 때다. 그는 "지금은 도쿄(올림픽)만 바라보고 산다"고 했다. 당시 소속 팀과 계약기간이 끝난 김연경에게 '러브 콜'이 쏟아지고 있었는데 소속팀과 대표팀을 수시로 오가는 데 지장받지 않는 팀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을 정도였다.

김연경은 가끔 나태해질 때면 그가 2017년 펴낸 자서전을 뒤적인다고 한다. 자서전의 첫머리도 런던올림픽 동메달 결정전에서 패한 날의 회상으로 시작한다. 김연경은 "책에서 만년 벤치 신세였던 때를 찾아본다. 울컥하다가도 내가 너무 옛날을 잊고 살았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게 된다"고 했다.

'아직 끝이 아니다.'

김연경의 자서전 제목이다. 그가 꿈꿔왔던 도쿄올림픽 피날레가 머지않았다.

윤태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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