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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C의 애매한 '정치중립' 규정...손더스의 'X자 세리머니' 처벌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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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C의 애매한 '정치중립' 규정...손더스의 'X자 세리머니' 처벌될까

입력
2021.08.07 17:00
수정
2021.08.0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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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중립' 규정한 IOC 헌장 50조
올림픽 시상대 '흑인민권운동' 세리머니 이후 도입
"선수들의 표현 자유 억압" 비판 거세져

미국의 포환던지기 선수 레이븐 손더스가 1일 시상식에서 'X자 세리머니'를 선보이고 있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미국의 포환던지기 선수 레이븐 손더스가 1일 시상식에서 'X자 세리머니'를 선보이고 있다. 도쿄=로이터 연합뉴스

1일 도쿄올림픽 육상 여자 포환던지기 종목에 출전해 은메달을 획득한 미국의 레이븐 손더스는 시상대에서 억압에 저항하는 의미로 'X자 세리머니'를 결행했다. 메달 박탈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이 행위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규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다.

"올림픽이 열리는 장소, 경기장 등 기타 지역에서 어떠한 종류의 시위나 정치적·종교적·인종적 선전도 허용되지 않는다." IOC 헌장 50조의 내용이다. 같은 조항은 국제패럴림픽위원회(IPC) 규정에도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IOC 헌장 50조에 대한 비판이 크게 늘어가는 상황에서 손더스의 'X자 세리머니'는 이런 비판에 기름을 붓고 있다.


스포츠계 안팎서 거세지는 '50조 흔들기'


한때 조선시대 명장 이순신의 명언을 인용한 현수막이 걸렸던 한국 올림픽 대표팀 숙소 모습. 이 현수막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요청으로 철거됐다. 도쿄=연합뉴스

한때 조선시대 명장 이순신의 명언을 인용한 현수막이 걸렸던 한국 올림픽 대표팀 숙소 모습. 이 현수막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요청으로 철거됐다. 도쿄=연합뉴스

IOC는 헌장 50조를 근거로 도쿄올림픽 시작 전부터 흑인 생명권 운동(블랙 라이브즈 매터·BLM)의 '무릎 꿇기' 시위를 징계하겠다고 밝혔다. 한국 선수촌에 걸렸던 '이순신 현수막'도 IOC의 요청으로 철거됐다.

하지만 이런 헌장 50조가 최근 흔들리고 있다. 계기가 된 것은 지난해 크게 번진 BLM 시위다. 미국 올림픽·패럴림픽 위원회(USOPC)는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과잉 폭력으로 살해된 사건에 대한 선수들의 시위가 이어지자 지난해 12월부터 '평화적 시위를 한 선수는 징계하지 않겠다'는 새 규칙을 발표했다.

도쿄올림픽 개막식 당일 선수와 학자, 활동가 등 약 150명은 IOC와 IPC에 "인권과 인종·사회정의, 사회적 포용에 대해 더 강력한 의지를 보이라"고 촉구하면서 해당 조항을 적용하지 말 것을 권고하는 공개 서한을 발표했다.

서한에 서명한 인물 중 한 명인 미국 버지니아공대 레티샤 브라운 사회학과 교수는 미국 공영방송 PBS에 "선수들도 사람이고,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엮는 힘을 가진 인물들인 이상 비슷한 시위는 계속될 것"이라며 "그들이 이 세계에 존재하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감정을 표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IOC는 이번 도쿄올림픽을 앞두고 '50조에 대한 선수들의 지지가 높다'는 것을 근거로 50조를 고수했다. 하지만 동시에, 기자회견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개인 계정은 물론 경기 전 운동장에서의 표현도 허용하겠다는 신규 조항과 가이드 라인을 내놔 타협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에 따라 이번 도쿄올림픽 여자 축구 종목에 출전한 선수들이 경기 전 함께 '무릎 꿇기'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흑인 민권 운동 세리머니에 가혹했던 IOC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200m 달리기 금메달리스트 토미 스미스와 동메달리스트 존 카를로스는 미국 내 인종차별에 항의하기 위해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메달 수여식에서 높이 들어올렸다. IOC 홈페이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200m 달리기 금메달리스트 토미 스미스와 동메달리스트 존 카를로스는 미국 내 인종차별에 항의하기 위해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메달 수여식에서 높이 들어올렸다. IOC 홈페이지

50조는 "스포츠는 정치와 연관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정을 구현한 조항으로 알려져 있다. 토마스 바흐 IOC 사무총장은 "올림픽은 통합과 다양성에 관한 이야기지 정치와 수익에 대한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50조의 도입 계기가 인종차별 반대를 표시하는 시위를 금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견해를 보인다.

실제로, 50조 도입 이전 올림픽에선 무수히 많은 '정치적 표현'이 있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체조 선수 베라 차슬라프스카는 소련 국가가 울릴 때 항의의 표시로 소련 국기를 외면했다. 당시는 소련이 '프라하의 봄'을 억누르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때였다. 또 1960년 올림픽에서 대만 선수들은 IOC 측이 대만 대신 '포모사'라는 명칭을 강제로 적용하려 하자 개회식부터 항의를 했다.

이런 경우에 별다른 입장을 보이지 않았던 IOC는 흑인 선수들의 민권운동에 대해선 가혹한 징계를 내렸다.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당시 육상 남자 200m에서 각각 금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한 미국의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는 시상대에서 검은색 장갑을 착용하고 손을 들어올렸다가 징계를 받고 더 이상 올림픽에 나설 수 없게 됐다.

1972년 뮌헨올림픽 육상 남자 400m에 출전한 빈센트 매슈스와 웨인 콜렛도 시상대에서 미국 국기를 존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IOC로부터 출전 금지를 당했다. 이후 1974년, 올림픽 규정에는 '경기장에서 정치적 모임이나 시위를 해선 안 된다'는 조항이 들어갔고, 1975년 개정돼 현재 '50조'의 기본 골격이 만들어졌다.



"정치 중립 주장 IOC, 이윤 극대화 원하기 때문"

일본 이바라키현 가시마에서 열린 여자축구 4강전에서 미국 선수들이 무릎을 꿇고 있다. IOC는 경기 시작 전 경기장에서의 정치적 표현은 허용한다고 밝혔다. 가시마=AP 연합뉴스

일본 이바라키현 가시마에서 열린 여자축구 4강전에서 미국 선수들이 무릎을 꿇고 있다. IOC는 경기 시작 전 경기장에서의 정치적 표현은 허용한다고 밝혔다. 가시마=AP 연합뉴스

'X자 세리머니'를 결행한 손더스가 처벌되지 않을 가능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번 올림픽부터 IOC는 각 국가별 올림픽위원회에 규정을 적용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했는데, USOPC는 "증오 표현이 아닌 이상 선수도 표현의 자유가 있다"며 손더스의 징계를 거부했다.

미국 선수단의 여러 관계자가 손더스의 세리머니에 동참하기로 계획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더구나 손더스의 모친이 3일 갑작스럽게 숨지면서 IOC도 조사 절차를 잠정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SI)의 마이클 로젠버그 선임기자는 "IOC가 올림픽을 정치에서 떨어트려 놓으려 하는 이유는 이윤 극대화만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이 매체는 이번 올림픽에서 벨라루스의 육상 선수 크리스치나 치마노우스카야가 선수단을 비판했다가 트랙에 서지 못하고 납치당할 뻔했으며, 결국 망명길에 오르는 동안 IOC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다며 "선수 보호보다는 국가와의 원활한 관계와 상품 판매를 중시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IOC는 손더스가 결행한 '시상대 위 정치적 표현'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을 밝혀 놓은 터였다. 하지만 1968년과 72년 흑인 선수들에게 냉담했던 미국 여론은 30여 년이 지나 손더스를 압도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IOC가 '국가와의 원활한 관계'를 원한다는 로젠버그의 지적을 고려해 보면, 더 이상 50조에 근거를 둔 징계 논의를 밀어붙이기 곤란한 처지가 된 셈이다.

인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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