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한 줌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

입력
2021.08.01 22:00
27면
0 0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구순이 넘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아직도 두 분만 살고 계신다. 거의 평생을 살아온 시골집에 영정 사진과 장례비 봉투를 옷장 안에 넣어두고, 이 집에 끝까지 남아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고 가시겠다고 완고하게 말씀하신다. 두 분의 운명이 이제 하늘에 맡겨졌음을 가족으로서 직감한다.

당신들의 존재는 급격히 저물어가고 있다. 몸에 정신과 육체가 있다면 두 분께서는 각자 한 부분씩 무너지는 중이다. 할아버지는 정신이 또렷하지만 육체가 기울고 있다. 등허리는 너무 심하게 굽었고 무릎이 좋지 않아 스스로 걷는 일도 힘에 부친다. 하루 대부분을 누워 있고 가끔 일어나 앉는 정도다. 오래전부터 청력이 약해졌다가 지금은 거의 듣지 못한다. 과묵한 성격에 들리지 않으니 거의 말씀하시지 않는다. 가끔 필담으로만 당신과 가벼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신의 정신은 그대로 저물어가는 육체 안에 갇혔다.

생활을 건사하는 일은 할머니에게 맡겨졌지만 할머니는 정신을 놓아가고 있다. 상한 음식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지저분한 곳을 청소하지 못한다. 더러운 옷가지가 쌓이고 집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악취가 난다. 할머니의 언어 또한 갈수록 퇴행한다. 너무 옛날이야기를 꺼내거나 같은 이야기를 지겹도록 반복하시거나 사리분별이 어렵다. 할머니의 세계는 이제 한 줌밖에 남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도움 없이 생활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당신의 자녀들이 주기적으로 방문해 그들을 지탱하고 있다.

할머니는 평생 물자를 절약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살아오셨다. 당신의 기억과 행동은 당신이 수호해온 가치 아래에서 이제 너무 극단적이다. 집 안에 전혀 불을 켜지 않는다. 솥으로 물을 끓여 찬물과 섞어 세수를 하고 남은 물로 빨래를 한 다음 변기에 부어서 내린다. 냄비로 밥을 짓고 모든 반찬을 쪄서 드시는 대신 밥솥과 전자레인지의 코드를 뽑아버렸다. 자녀들이 방문하면 밥을 먹었냐고 수없이 묻고 집에 있는 허드레를 가져가라고 하시며 자꾸 도둑이 몇 백 원을 가져갔다고 하신다. 당신은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직접 겪으셨다. 당신이 직면하는 시기는 아마 그때인 것 같다.

그 역사를 직접 겪었던 분이 아직 살아계시다는 사실이 당연하면서도 놀랍다. 나는 당신이 통과한 시대를 가끔 생각한다. 도둑과 강도가 정말 흔한 일이고 불시에 금전적인 손해를 보면 당장 생존이 위태롭다. 절약하지 않으면 온 가족이 굶고, 아이들을 단단히 보살피지 않으면 죽음을 맞는다. 이 땅에 생존해 있는 사람들이 겪었던 가장 궁핍한 시절로 당신은 돌아가셨다. 당신을 구축한 가장 강렬하고 곤란한 시기였기 때문일 것이다. 제발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간청해도 당신께서는 완고하게 전기 코드를 뽑거나 길에서 물건을 줍는다. 아마 떠날 때까지 그 시절에 머물 것이다.

왜 인간의 기억은 가장 궁핍했던 시절로 퇴행하여 고착하는가. 당신들께서는 구십 년이 넘게 살면서 끝없이 일해 자손을 남겼다. 당신의 세대를 물려받은 우리는 지금 번영과 평화를 이룩했다. 그러나 당신은 끝내 모든 것이 미지였던 세계에 안착하셨다. 무엇 때문일까. 그 기억이야말로 당신 존재의 의미였기 때문일까. 혹여나 당신은 당신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으로 돌아가시려고, 또 그렇게 인생이 회귀한다는 사실을 당신의 자손들에게 알리고 떠나시려고.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