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LH 땅 투기 사태 등 시대상 담은 뮤지컬 '판'
'역병'이 도는 조선 후기. 양반가 자제 달수가 주막에 들어가려는데 제지를 당한다. 입장하려면 '명부'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 달수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허허, 흰 백(白)자에 몸 신(身)을 쓰는 '백신침'을 맞았어도 명부는 써야지!" 달수가 흔쾌히 주막 입구에 놓인 장부 위에 자신의 이름을 쓰자 주모가 기계적인 음성으로 대꾸한다. "인증되었습니다."
지난 27일 서울 국립정동극장에서 개막한 창작 뮤지컬 '판'은 이렇듯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일상으로 침투한 오늘날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판'은 2015년 정은영 작가와 박윤솔 작곡가가 만든 20분 분량의 짧은 공연에서 시작돼 2017년 초연을 거쳐 2018년 재연, 올해 삼연에 이르렀다. 국립정동극장의 창작공연 발굴 사업 '창작 ing'의 선정작이다. '판'은 패관소설이 금지된 19세기 후반 달수가 소설을 맛깔나게 읽어주는 이야기꾼 '전기수'를 우연히 만나고, 자신도 이야기꾼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다룬다.
'판'의 특징은 시사성이 크다는 점이다. 올해 공연의 경우 '역병'이라는 설정을 통해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상황을 극에 담았다. 방역 차원에서 관람 방식도 달라졌다. 원래 배우들의 유도로 관객이 추임새를 넣으며 흥을 표출하는 관객 참여형 공연이었으나 이번 시즌만큼은 박수만 쳐야 한다.
이 뮤지컬은 특히 당대의 사회문제를 적극 풍자함으로써 예술의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는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초연 당시 '판'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로 인해 불거진 '국정농단 사태'를 무대 위로 올리며 주목받았다.
올해는 부동산 투기 사건이 도마에 올랐다. 극중에서 사또는 역병이 도는 상황에서도 헌 땅을 사들여 탑을 세우고, 버드나무를 심는다. 신도시 땅 투기로 국민적 공분을 산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태'를 노골적으로 겨냥한 셈이다. '두껍아 두껍아 헌 땅 줄게 새 집 다오' 등 넘버 속 가사는 사리사욕에 빠진 공직자의 백태를 신랄하게 꼬집는다. 정 작가는 "부동산 투기 사건은 성실히 땀 흘려 돈을 벌고 살아가는 대다수 국민에게 상처를 줬다"며 "공정한 사회가 회복되길 바란다"고 취지를 설명했다.
'판'은 우리 고유의 연희 판에 서양 음악이 결합한 예술미를 자랑한다. 양주별산대놀이와 꼭두각시놀음, 판소리 등 전통예술이 100분간 곳곳에서 등장한다. 국악 가락에 클래식과 탱고, 스윙, 보사노바 등 장르가 더해져 귀가 즐겁다. 무대 배경과 의상은 전통극을 표방하지만, 대사나 넘버 등은 현대 뮤지컬 문법에 맞게 연출돼 뮤지컬 팬이라면 친숙하게 관람할 수 있다. 극이 끝날 무렵 온몸이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열연을 펼치는 배우들의 열정도 인상적이다. 9월 5일까지 국립정동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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