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 보장요? 예전에 고용노동부 근로감독을 받을 때도 비밀이 보장된다 했죠. 하지만 근로감독관이 조사한 날짜를 보고서 회사는 그날 쉬었던 직원, 조사 대상 팀에서 불만 많은 직원 등을 추려서 특별관리에 들어가죠. 이런 일이 반복되니 신분을 숨겨주겠다는 정부 약속을 믿기 어려워요."
22일 박창진 정의당 부대표가 전한 요즘 대한항공 내부 분위기다. 박 부대표는 '땅콩회항' 사건 때문에 끝내 대한항공을 떠나 정치의 길로 접어든 인물. 그는 "익히 알려진 'X맨 제도'로 서로를 감시하고, 조금만 이상해도 바로 색출작업에 들어가는 게 대한항공 특유의 분위기"라고 말했다.
대한항공은 최근 고용부 조사를 받고 있다. 정부의 고용유지지원금을 받아 휴직 중인 직원들에게 업무 지시를 내렸다는 의혹(본보 6월18일 자 단독 보도) 때문이다. 고용유지지원금은 코로나19 사태의 직격탄을 맞은 항공업계 등을 위해 마련된 제도다. 회사 사정이 어렵다고 곧바로 해직하지 않고 휴직 처리하면 휴직 수당의 90%를 정부가 지원해준다. 이 제도 덕에 대한항공의 휴직 인원은 매달 8,000여 명 수준이며, 지난 1월 이후 약 572억 원의 지원금을 받았다. 정부 돈은 돈대로 받으면서 일은 일대로 시키면, 부정수급이 된다.
의혹이 제기되자 고용부는 곧바로 고용유지지원금 지원을 중단한 뒤 조사에 착수했다. 직원 수백 명에게 문답 진술을 요청했다. 고용부의 요청서에는 '귀하의 답변 내용은 익명이 철저하게 보장되니 적극 제보를 바란다'고 명시되어 있다.
고용유지지원금 부정수급 의혹에 대해 대한항공 직원들은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다. "언론에 보도된 건 빙산의 일각"이라거나 "휴직 해놓고 업무보고 하는 일은 다반사"라는 수군거림이 적지 않다. 그렇다고 속 시원하게 제보할 분위기도 아니다. "진술을 바탕으로 조사하기 위해 고용부가 회사에 자료 요청을 하는 순간 제보자가 누군지 드러날 테고, 그 순간 회사는 내부 신고자를 처형시킬 것"이란 말까지 흘러나온다.
고용부의 원죄(?)도 있다. 2018년 게임제작사 넷마블 직원들이 익명으로 사측의 근로기준법 위반 행위를 고발했을 때, 사측이 부인하자 조사를 진행하던 근로감독관이 자료 일부를 보여주는 바람에 고발자 신분이 노출됐다는 논란에 휩싸였다. 그래서인지 이번 조사에서만큼은 익명 보장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신원 노출을 막는 방법도 고안해뒀고, 서면으로 자료를 받은 뒤 조사 대상 전원에 대해 전화를 할 예정이다. 누가 말했는지 모르게 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게 박 부대표의 충고다. 그는 "회사 특유의 분위기를 고려할 때 내부고발자로 의심만 받아도 회사 생활이 어려워진다는 점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사실 대한항공 직원 입장에서 부당수급 논란 자체가 불편하다. 항공업계의 어려움을 감안하면, 일자리와 지원금만큼 소중한 건 없다. 눈 한번 질끈 감으면 그만인 일이다. 그럼에도 이렇게는 아니다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기밀 유지와 조사 결과로 고용부가 그 심정에 대답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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