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공항서 14개월 숙식... '한국판 터미널' 아프리카 난민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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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서 14개월 숙식... '한국판 터미널' 아프리카 난민의 하루

입력
2021.07.04 20:00
수정
2021.07.05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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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 신청 거절로 1년 2개월간 환승 게이트 노숙
공항 밖 나온 지 2개월 지났지만 경제 활동 못해
변변한 교재도 없이 A4 용지에 ㄱ, ㄴ, ㄷ 열공
"많은 분께 감사...한국서 살고 싶어"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공익법센터 어필 사무실에서 만난 아프리카 출신 난민 신청자 A씨. 그는 난민 신청 접수를 거부당해 인천국제공항 환승구역에서 423일 동안 지냈다. 왕태석 선임기자

"신에게 아이들이 어디에 있든 잘 보살펴 달라고 기도하는 것만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영화 '터미널'은 동유럽인이 모국의 쿠데타로 국적을 잃고 뉴욕 JFK 공항 환승구역에서 9개월 동안 지내며 벌어진 일을 그린 영화다. 아프리카인 A(47)씨 처지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반군의 핍박을 피해 모국을 탈출했다. 그러나 환승객이었다는 이유로 난민 신청을 거부당해 인천국제공항 환승구역에서 올해 4월까지 1년 2개월간 지냈다. 제1터미널 43번 게이트에 장기간 발이 묶인 상황에서도 모국에서 일찌감치 연락이 끊긴 어린 다섯 자녀들에 대한 걱정이 가득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종로구 공익법센터 어필 사무실에서 만난 A씨는 공항 생활을 떠올리면 여전히 아찔하다고 한다. 그는 동남아시아 국가에서 서류 부족으로 난민 신청을 거절당한 후 남태평양 섬 나라로 가려다 지난해 2월 16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다시 난민 신청을 시도했다. 그러나 법무부는 한국이 경유지란 이유로 신청서조차 받아주지 않았다. A씨는 간절했다. 그는 "한국 정부에서 모국 정부가 바뀔 때까지만이라도 저를 보호해주길 바란다"고 읍소했다.

아프리카 출신 A씨가 인천국제공항에서 머물 당시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는 모습. 공익법센터 어필 제공

A씨는 법무부와 법적 싸움을 벌이는 1년 2개월 동안 유엔난민기구(UNHCR)와 국내 공익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공항에서 숙식했다. 잠은 환승객 틈바구니에서 자고, 환승 게이트 바닥에 앉아 밥을 먹고 화장실에서 씻었지만, 고국에 남은 가족들을 생각하면 불평할 겨를이 없었다.

A씨는 법원에 수용 임시 해제 신청을 내 승소하고 나서야 423일 만에 공항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난민 심사도 신청했다. 지금은 국제난민지원단체인 '피난처' 숙소에서 임시로 머물고 있다. 공익단체에서 생필품을 지원해 당장의 생활엔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앞으로가 걱정이다. 경제 활동을 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인터뷰 당일에서야 난민 신청자 자격(G-1-5) 비자가 나와 외국인 등록증을 받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 체류 비자여서 구직 활동은 쉽지 않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한국어를 공부하거나 숙소 주변을 산책하거나 피난처에 있는 고양이에게 물을 주는 게 하루 일과다. 변변한 한국어 교재도 없다. 그 대신 A4 용지에 'ㄱ,ㄴ,ㄷ'을 쓰며 한국어 철자를 익히고 있다. 그나마도 피난처 직원이 알려준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분들이 선생님이나 마찬가지여서 빠른 속도로 적응하고 있다"며 "직원이 한국어를 녹음해주면 그걸 듣고 따라하는 식으로 공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프리카 출신 난민 신청자 A씨가 A4 용지에 한국어 공부를 한 모습. 왕태석 선임기자

A씨는 현재 법원 승소 판결로 난민 심사를 신청해 기다리고 있다. 결과가 나오기까지 빨라야 수개월. 그러나 난민이 인정되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난민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출국을 해야 하지만, 딱히 돌아갈 곳도 없다. A씨는 "난민 인정을 못 받으면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냐"는 질문에 "(반군 때문에) 고국에 갈 수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의 꿈은 소박하다. 난민으로 인정돼 한국에서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신뢰감을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여러 공익단체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만큼, 주변인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꿈꾼다.

"저를 도와준 분들께 정말 감사하다고밖에 말을 못 해요. 수천 번 감사드려요. 난민으로 인정되면 일을 하면서 살고 싶어요. 주변분들과 잘 지낼 수 있도록 스스로 신뢰감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제가 생각하는 한국에서의 미래입니다."



윤한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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