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민주투사 틴 마웅 우 45주기 시위
64명 사형선고 군부, 러시아와 무기 협상
"군부가 내 몸을 죽일 수 있지만, 내 믿음은 죽일 수 없다. 군부의 군화 앞에 절대 무릎을 꿇지 않겠다."
1976년 6월 26일 오후 6시. 사형대에 선 25세의 양곤대학교 학생 틴 마웅 우는 결연하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 그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은 3개월 동안의 끔찍한 고문에도, 사형선고 직전 "'시위를 벌인 것이 잘못됐다'고 인정하면 감형해 주겠다"는 재판부의 회유에도 꺾이지 않았다. 1970년대 미얀마 민주화 운동가 중 최초로 교수형에 처해진 그의 유언은 이후 모든 반(反)군부 시위 현장에 빠짐없이 등장했다.
틴 마웅 우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 45년째가 된 지난 26일. 그가 살았던 양곤을 시작으로, 만달레이와 사가잉ㆍ마궤ㆍ타닌타리주(州) 등 전국 각지에서 다시 "군부의 군화 앞에 무릎 꿇지 않겠다"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전국의 시위대는 그의 유언이 쓰인 현수막을 들고 거리를 행진하며 군부 타도 구호를 목놓아 외쳤다. 대학생들은 그를 추모하는 의미의 붉은 손목 밴드를 하고 거리를 활보했으며, 일부 시민들은 군부 깃발을 불태우는 화형식을 벌이기도 했다.
비폭력 평화 시위 기조에 군부는 일단 상황을 지켜만 봤다. 대신 이들은 계엄령이 내려진 양곤 등에서 28일 기준으로 총 64명의 시위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 아직 실제 사형 집행까지 이뤄지진 않았으나 언제든 제2의 틴 마웅 우가 나올 수 있다는 경고를 보낸 셈이다. 미얀마의 경우 계엄령 발동 지역의 정부군이 시민들의 생살여탈권을 모두 쥐고 있다. 사형 선고에 대한 번복은 군부 수장인 민 아웅 흘라잉 최고사령관만이 할 수 있다.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흘라잉 사령관은 협박으로 자국 시민들의 외침에 답했다. 일주일째 러시아에 머물고 있는 그는 현지 매체 스푸트니크와의 인터뷰에서 “미얀마군은 러시아 덕분에 지역에서 가장 강한 전력을 보유하게 됐다”며 "러시아와의 회담을 통해 앞으로 군사협력 관계를 더 확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우방 러시아로부터 더 많은 무기를 사들여 민주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탄압하겠다는 취지다.
동남아의 한 군사 소식통은 "흘라잉 사령관과 동행한 미얀마 해군총장이 러시아산 신형 초계함 4척을 구매하기 위해 협상 중"이라며 "군부가 시민방위군 및 소수민족 반군들과의 전투 장기화를 예상하고 육해공 모든 전력의 보강에 나서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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