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 건물 일대 해체계획서 분석]
구조 안전계획 없어도 구청 승인
해체계획 따로 내는 규정도 없어
재개발 땐 여러 채를 한 번에 부숴
"건물 유형 고려한 세부 계획 필요"
광주광역시 동구 재개발지역에서 발생한 철거 건물 붕괴 참사의 주요인으로 허술한 해체계획서 작성 및 허가 절차가 지목되고 있다. 많게는 건물 수십 채를 한꺼번에 철거해야 하는 재개발사업의 경우, 건물마다 구조적 여건이 제각각임에도 이를 무시하고 해체 방법을 뭉뚱그려 기술한 계획서가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전문가들은 지형 지물, 구조 등 건물별 특성을 고려해 해체계획서를 세부적으로 작성토록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부실한 해체계획서… 구조안전 계획도 없어
13일 한국일보가 권영세 국민의힘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학동4구역 철거 공사 계획서(해체계획서)'는 이번 사고 건물을 포함해 철거 대상 건물 11개 동에 대한 △개요 및 현황 △안전도 검사 △철거 공사 계획 △현장 안전 계획 등이 담긴 150쪽 분량 문건이다. 이 계획서는 공사 관리자인 학동4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조합과 철거 시공자인 한솔기업이 광주 동구청에 지난달 14일 제출해 허가받은 문건이다.
계획서를 살펴보면 전체 분량의 절반이 철거 대상의 면적, 주소, 층수, 평면도 등 단순한 건물 정보를 나열하는 데 할애됐다. 더구나 철거 방법을 설명하는 부분엔 정부 당국이 규정한 기재 항목이 누락됐다. 국토교통부 고시인 '건축물 해체계획서의 작성 및 감리 업무 등에 관한 기준'에 따르면 계획서에는 구조 안전 계획과 구조 보강 계획이 포함돼야 한다. 이에 따라 해당 건축물의 전도 및 붕괴 방지 대책, 작용하중(구조물에 실제로 작용하는 하중) 등도 기재돼야 한다. 하지만 학동4구역 해체계획서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담기지 않았다. 철거 대상 11개 동에 특정 해체 공법(크러셔 공법)이 일괄 적용된 것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허가권자인 동구청은 계획서를 승인했다. 이번 사고가 '민관 합작품'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단 4쪽 분량인 현장 안전 계획은 법령과 고시에 따라 형식만 갖췄을 뿐 건물별 특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특히 사고 건물은 도로를 마주하고 있어 보행자 및 통행 차량을 위한 안전 대책이 필수였지만, 계획서에는 '라바콘 설치' '공사 중 서행 표시판 설치' 등 기초적 사항만 포함됐다. 철거 전 '주변 보행자 통행과 차량 이동 상태'에 대한 점검 항목에도 구체적 서술 없이 '확인했다'는 뜻의 체크 표기만 있었다.
사고 건물의 해체 계획은 애당초 현장 적용이 어려웠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해체계획서에는 도로에서 건물을 바라볼 때 기준으로 좌측면→후면→우측면→전면 순으로 철거한다고 명시돼 있었지만, 사고 건물 좌측면은 2층짜리 건물과 인접해 철거 작업을 진행할 공간이 나지 않았다. 동구청에 따르면 인접 건물은 건물주가 동의하지 않아 철거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철거업체가 계획과 다르게 후면부터 철거하다가 사고를 초래한 이면에는 이런 '엉터리' 해체계획서가 버젓이 작성돼 검토·허가 절차를 무사통과하는 현실이 자리한 셈이다.
통짜 해체계획서, 재개발지역 공통 문제
이는 비단 학동4구역 재개발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업계 관계자들은 재개발사업의 경우 여러 채를 한 번에 부순다는 명분으로 해체계획서를 단건으로 제출해 승인받는 일이 관행처럼 이뤄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조성구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 부회장은 "대규모 철거 공사장은 건물별 해체계획서가 아닌 구역별 해체계획서를 제출하는 것이 보통"이라며 "건물별 해체 계획 또는 주변 지형이나 구조 등을 유형화한 해체 계획을 따로 내도록 규정돼 있지 않다 보니 상대적으로 개괄적 내용만 담길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런 맹점을 감안해 해체계획서 제출 전에는 전문가 검토, 계획서 허가 후에는 감리자의 현장 감시를 통한 제도적 보완을 꾀하고 있지만 한계는 뚜렷하다. 건물구조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검토자나 감리자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최일섭 연우구조 대표는 "구조기술사가 1,200여 명밖에 되지 않아 현실적으로 이들이 모든 해체계획서를 작성·검토하거나 현장 감리에 나서는 건 어렵다"면서도 "해체계획서 검토 과정에서 구조기술사의 관여를 의무화하는 등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건물 유형별로 해체 계획 세세히 짜야"
나아가 건물 유형별로 세부적인 해체 계획을 짜도록 의무화해야 한다는 제안이 나왔다. 조 부회장은 "건물 해체 작업 중 발생하는 소음 및 분진에 대한 관리 방법은 공통적으로 제시할 수 있지만, 건물은 층수·모양·주변지형·구조 등 특성이 뚜렷하기 때문에 해체 계획 및 공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게끔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고창우 티섹구조 대표는 "5층 이상 건물에 대해서는 세부적 수준의 해체 계획을 제출하도록 하는 것이 현실적 방도가 될 수 있다"며 "다만 좋은 계획이 마련되더라도 현장에서 지켜야 의미가 있는 만큼, 제도 강화와 사회적 합의가 병행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서울 성동구 용답동 재개발사업을 참고 사례로 제시한다. 용답동 108-1번지 일대는 올 초부터 해체 작업이 진행 중인데, 도로를 맞대고 있는 건물들에 대해선 해체 허가를 늦추고 있다. 성동구청 관계자는 "해당 구역은 평지인 데다가 옆에 청계천이 있어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라, 공사 기간 안전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이에 구청은 도로 쪽 건물들을 나중에 해체하기로 결정했고, 그 결과 이들 건물이 견고한 담장 역할을 맡아 해체 과정에서 발생하는 분진이나 소음 확산을 감쇄시키고 전도 가능성 역시 차단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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