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더 그 사회의 영혼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 넬슨 만델라의 말에 비쳐보면, 대한민국의 영혼은 갈기갈기 찢기고 뜯긴 상처투성이다. 형용하기 힘들 만큼 참담한 아동학대, 세월이 흘러도 절대 지워지지 않는 학교폭력의 굴레 속에서 우리의 아이들과 학생들은 여전히 신음하고 있다. 폭력에는 끝이 없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자의 상처는 더 깊이 파이고, 가해자의 폭력은 또 다른 폭력으로 전염되기 마련. 그러니 애당초 싹을 틔우지 못하도록 끊어내야 한다. 이번 주 나온 두 권의 책은 폭력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쓴 용기 있는 외침이다. 어느 한순간은 폭력의 가해자 그리고 방관자였을 우리 모두가 새겨야 할 내용이다.
‘사랑의 매’는 폭력임을 알려준 ‘삐삐 엄마’
1979년 스웨덴은 세계 최초로 학교뿐 아니라 가정 내 자녀 체벌을 금지했다. ‘사랑의 매’가 훈육이 아니라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폭력 행위라는 걸 법에 못 박은 것. “매를 아끼면 아이를 망친다”(구약성서)는 인식이 상식처럼 굳어진 당시로선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반발도 컸다. 부모의 권위가 떨어진다거나 가정 해체를 운운하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하지만 이 모든 논란을 한방에 잠재운 연설이 있었다.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으로 잘 알려진 아동문학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이 1978년 독일 출판사서점협회 평화상을 받으며 발표한 ‘폭력에 반대합니다’였다. 아동 폭력 반대 메시지의 기념비가 된 이 연설문이 동명의 책으로 한국에 처음 소개됐다.
린드그렌은 연설문에서 아동에 대한 폭력을 체벌이나 아동학대 등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오로지 폭력(violence)이라고만 지칭했다. 훈육을 전제로 어린이에게 가하는 신체적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폭력은 그저 폭력일 뿐,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미화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어린이에 대한 폭력을 멈추는 것이야말로 전쟁 등 세상의 폭력을 종식시키는 ‘근본’임을 역설한 점도 눈에 띈다.
연설문의 마지막을 장식한 일화는 그대로 전한다. 아이가 하도 말썽을 부리자, 어느 날 엄마는 난생 처음 아이에게 매를 들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아이에게 직접 회초리를 구해 오라고 했다. 한참 후에 아이는 울면서 돌아왔다. “회초리는 못 찾았어요. 대신 엄마가 저한테 던질 수 있는 돌멩이를 구해왔어요.” 엄마는 아이의 눈에서 돌멩이를 구해온 마음을 짐작하고 오열했다. ‘엄마는 나를 아프게 하고 싶어해. 그렇다면 돌멩이도 괜찮을 거야.’ 엄마는 “폭력은 절대 안 돼”라고 결심을 했고, 그 약속을 끊임 없이 상기하고자 부엌 선반에 돌멩이를 올려뒀다.
린드그렌은 우리의 부엌 선반에도 작은 돌멩이를 하나 올려두자며 이렇게 말한다. “세상엔 잔인함과 폭력과 억압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은 날마다 보고 듣고 읽으면서 폭력을 자연스러운 상황으로 믿을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가정에서만이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다른 방식이 있음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요?”(44쪽)
스웨덴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포함해 62개국에서 아동 체벌 금지법이 만들어졌지만, 여전히 전세계 어린이 절반에 달하는 10억 명의 아이들이 정신적, 신체적, 성적 폭력에 희생되고 있다. ‘돌멩이’의 깨우침을 필요로 하는 못난 어른들이 아직 너무 많다.
자책과 외면을 이겨내고 폭력을 마주한 용기
책의 추천사를 쓴 은유 작가는 ‘여섯 개의 폭력’에 대해 ‘붕괴의 서사’이자 ‘복구의 서사’라고 했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여섯 명은 책에서 각자가 겪은 고통을 가감 없이 토해낸다. 다섯 명은 ‘무사히’ 어른이 됐지만, 한 명(권승민군)은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세상을 등졌고 어머니가 대신 기록으로 남겼다. 작가, 편집자, 유튜브 크리에이터, 사회복지사 등으로 살고 있는 나머지 저자들에게 십대 시절, 학교는 지워내야만 살아남는 기억이다.
또래 간의 폭력이 더 잔인한 건 괴롭힘의 이유조차 모른다는 거다. ‘성적이 좋아서’ ‘장애인의 동생이라서’ ‘뚱뚱해서’ 그러다가 ‘그냥 싫어서’ ‘괴롭히는 맛이 있어서’ ‘장난으로.’ 피해자들은 자책으로 스스로를 파괴한다. “가장 괴로운 건, 나 자신을 혐오하게 되고, 나의 가해자가 된다는 거다.” ‘친구들끼리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가는 부모와 교사들의 무신경함, ‘괜히 나섰다가 나도 당한다’는 친구들의 공고한 침묵과 외면은 피해자들을 나락으로 빠뜨린다. 무감각의 카르텔은 또 다른 가해자다.
그럼에도 이들은 더 이상 피해자로만 남지 않았다. 고통의 기억을 끄집어 내 당당히 마주했다. 진정한 사과 없는 가해자들을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하지도 않았지만 “어디선가 숨어서 울고 있을 많은 승민이들”에게 위로가 되기 위해 용기를 냈다. 고통을 전시하기 위함이 아닌 고통으로 우리가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약 지금의 내가 어리고 아팠던 나를 만난다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그 세상이 전부가 아니야. 네 잘못이 아니야. 그저 다음 장의 삶이 분명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만이라도 알려주고 싶다.” 우리는 모두 작고 외롭고 연약한 아이였다. 아이들을 지키는 건 결국 우리 모두를 지키는 일임을 두 책은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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