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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 말해야 하는 여성 과학자들

입력
2021.05.01 04:3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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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페미니스트라는 악명을 뚫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하미나 작가는 과학사 전공자답게 2030 여성의 건강문제, 덜 눈에 띄는 여성의 산업재해 문제 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2018년 미국 UC어바인 캐롤 새런 교수 등이 발표한 논문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와 공학계 여성 사이의 비판의 한계' 표지. MIT 홈페이지

2018년 미국 UC어바인 캐롤 새런 교수 등이 발표한 논문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능력주의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와 공학계 여성 사이의 비판의 한계' 표지. MIT 홈페이지

20대 남성 이야기로 시작해보자. 나는 프리랜서 작가로서 원고료보다는 주로 글쓰기 강의로 생계를 유지한다. 한 번은 온라인 글쓰기 수업 개설을 위해 젊은 PD를 만나 영상 촬영을 진행했다. 그를 택한 이유는 압도적으로 저렴한 가격 때문이었다. 그는 큰 방송국에서 일하다 퇴사해 홀로서기를 하는 과정 중에 있었고 나 역시 언론사 기자로 일하다 퇴사해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던 참이었다. 둘 다 들어오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잡아 몸을 갈아 넣어 일하던 시기였다. 퀭한 눈가와 넘치는 의욕, 부푼 꿈과 불안을 가진 둘은 약간 동지애를 느꼈던 것 같다.

18시간의 촬영을 서로 불평 하나 없이 마치고 아침녘 국밥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강의와 강의에서 소개한 글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국밥을 먹으며 대화하다가 갑자기 그가 주위를 한 번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저 작가님... 그런데 그거 있잖아요. 그...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속닥이며) 페미니스트..."

무시무시한 단어가 된 '페미니즘'

나는 이 상황이 너무 시트콤 같아서 듣자마자 파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그는 방금까지 자기와 오래 작업을 한 젊은 작가와 무시무시한 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혼란해 보였다. 그는 평소 페미니즘에 대해 가지고 있던 궁금함과 편견을 그대로 물어왔고 나는 성심껏 답했다. 이 에피소드를 친구에게 들려주니 다음번엔 이렇게 답하랬다. “뭐요? 잘 안 들려요. 페니스요?”

언제부터 페미니즘이 이토록 무서운 단어가 된 것일까? 또래 남성 집단에 내재한 강력한 ‘반(反) 페미니즘’ 정서가 갈수록 공고해지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이들 중 84.1%는 “페미니즘에 거부감이 든다”고 말하고, 78.9%가 “페미니즘은 여성 우월주의를 주장한다”고 생각한다. 기묘한 것은 “페미니즘은 한국 여성의 지위 향상에 기여해왔다”는 문장에도 64.8%가 동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페미니즘을 그 어떤 긍정적인 가치와도 연결하지 않겠다는 듯 말이다(천관율·정한울, '20대 남자: " 남성 마이너리티" 자의식의 탄생').

당혹스러운 것은 이들이 페미니스트가 일구어낸 성과와 문화를 긍정하면서 동시에 페미니스트를 혐오할 때다. 권력형 성폭력이나 낙태죄 폐지, 가정폭력 등 다양한 페미니즘 이슈에 공감하고 분노하는 남자들을 자주 본다. 그러면서도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너무 싫은 것이다. 그토록 싫어하는 페미니스트들이 다 하나씩 싸워서 이뤄놓은 것인데.

2018년 6월 10일 ‘임신중단 합법화’ 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비웨이브’(BWAVE)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처벌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8년 6월 10일 ‘임신중단 합법화’ 시위를 진행하고 있는 비웨이브’(BWAVE)가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임신중단 전면 합법화’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처벌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여성 공학도는 '차별'을 믿지 않는다

페미니스트가 일구어낸 성과와 문화를 긍정하면서 혹은 필요로 하면서 동시에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모습은 여성에게도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여성이라고 자연스레 페미니스트가 되는 게 아니다. 자신의 경험 뒤에 집단의 경험이 있음을 알고, 역사적·사회적 맥락에 자신을 위치시킬 수 있어야 페미니스트의 관점을 갖춘 것이라 볼 수가 있다.

미국 UC어바인 교수 캐롤 새런 (2018) 등은 2003~2007년 미국 내 4개 공과대학에 재학 중인 여성 공학도에게 일기를 쓰게 해서 공학 분야에서 이들이 자신의 지위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연구했다.

연구진은 여성 공학도가 공학 분야의 핵심적인 가치인 실력주의와 개인주의를 깊이 내재하면서, 동시에 페미니즘을 거부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들은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이라는 표현(논문의 제목이기도 하다)을 사용하면서 성차별을 직접 경험해도 이를 구조적인 불평등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공학 분야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첫째, 공학 분야 내 핵심적인 가치 중 하나는 실력주의인데 페미니즘이 특별대우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었고 둘째, 여성 공학도가 페미니스트로서 인식되는 순간 자신이 성취한 재능과 경험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주지 않을 거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나는 예외"라 생각하는 여성들

그러면 이들은 성차별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할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 연구진은 응답자의 특징으로 성차별적 발언을 직접 들을 때에도 자신은 예외일 거로 생각한다는 점과 자기 확신이 부족하고 자기 능력을 향한 의심이 내면화되어 부정적인 피드백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실력주의는 보통 한 개인에게 집단(성별, 인종, 성적 취향 등)에 대한 편견 없이 작동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입장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단 한 번도 동일선상에서 출발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연구진은 실력주의, 예외주의, 젠더 본질주의처럼 공학 분야 내에서 지속되는 이데올로기가 여성 공학도의 가치관에 큰 영향을 끼치고, 여성 공학도가 이를 수용하게 되면서 공학 분야에서의 불평등이 탈정치화한다고 지적한다.

10년도 지난 연구이니 현재 미국 사회 여성 공학도의 생각은 그때와 또 다를 것이다. 요즘 한국의 젊은 여성 세대는 성차별을 구조적인 문제로 보는 눈도 더 갖췄다. 그럼에도 연구의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과학 분야 내에서의 성차별은 실력주의와 예외주의를 통해 탈정치화되고 그러면서 변화가 더뎌진다.

이러한 연구는 '20대 남성 현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 이들은 자신이 경험하는 가난과 불평등을 구조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맥락 없는 공정에 집착한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피해자이면서 여전히 실력주의를 외치고 반드시 누군가는 실패하고야 마는 비트코인과 주식에 투자를 하며 '자신은 예외'일 거라 생각한다. 청년의 문제가 실력주의의 얼굴을 하며 탈정치화되고 또 다른 약자를 혐오하는 방식으로 갈수록 변화는 더뎌질 것이다. 내 옆의 적을 만들어 싸울수록 우리는 더 오래 가난하고 불행할 것이다.

미국 스탠퍼드대 과학사학자 론다 슈빙어(Londa Schiebinger) 교수는 과학·공학 분야에 성·젠더 분석을 적용하자는 "젠더혁신(Gendered Innovations)"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위키피디아

미국 스탠퍼드대 과학사학자 론다 슈빙어(Londa Schiebinger) 교수는 과학·공학 분야에 성·젠더 분석을 적용하자는 "젠더혁신(Gendered Innovations)"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위키피디아


여성과학자들조차 '가치중립적이지 않다' 생각하는 페미니즘

어느 분야이건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해당 업계의 동료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전문성이란 곧 멤버십의 문제다. 그들만의 리그에 나를 끼워줄 것인가? 끈끈한 남성 연대는 여기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 리그에 끼고 싶은 사람은 내가 당신들과 잘 어울리고 당신의 언어로 말하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내야 한다.

과학 분야 역시 마찬가지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과학에서 페미니스트가 진입하기 어려웠던 것은 페미니즘을 가치편향적인 것으로, 과학은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보며 정치와 무관한 것으로 보는 강력한 과학 문화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여성 과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오랫동안 여성 과학자들조차 과학은 공정하며, 과학적 방법론이 편견에서 자유로운 가치중립적인 것이라고 여겨왔다. 이렇게 될 때 페미니스트가 과학에 할 수 있는 일은 과학 지식의 남성 중심성에 대한 비판과 과학자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여성들을 도와주는 프로젝트로 날카롭게 양분된다. 후자가 현재 한국의 여성과학기술인정책의 모양새다.

당연히 이 둘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과학 분야 내에서 여성의 수가 많아질수록 과학 지식 생산에도 영향을 미치며, 또 그럴 수밖에 없다. 모든 지식은 그 지식을 생산한 사람의 위치를 반영한다.

페미니스트 과학학은 1970년대 이후로 과학의 남성중심성을 비판하며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과학적 객관성을 새롭게 사유해왔다. 여기에 더해 실제로 페미니즘이 어떻게 더 좋은 과학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고,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남성 중심성을 교정하는 좋은 연구들을 해내고 있다.


'젠더혁신' 프로젝트의 홈페이지 메인을 캡처한 화면.

'젠더혁신' 프로젝트의 홈페이지 메인을 캡처한 화면.


페미니즘이란 말 없이 페미니즘하기?

미국 스탠퍼드대 과학사학자 론다 슈빙어 교수가 이끄는 '젠더혁신(Gendered Innovations)' 프로젝트는 그간 페미니스트 과학학의 고민을 종합하여 적당히 손을 더럽힌(?) 결과로 보인다. 이 프로젝트는 새로운 지식과 기술을 만들어 내기 위해 성·젠더 분석을 모든 종류의 기초, 응용 연구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 프로젝트는 연구자들에게 페미니즘이 얼마나 중요하고, 페미니스트가 얼마나 타당한 주장을 하는지를 말하기보다는 성과 젠더 분석을 통하면 연구의 비용과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곧 더 '옳은' 과학이 아니라 더 '탁월한' 과학을 할 수 있다고 설득한다.

공식 홈페이지에는 연구자가 참고할 수 있도록 과학, 보건, 의학, 약학, 공학 등 다양한 분야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https://genderedinnovations.stanford.edu/). 각각의 사례는 모두 직간접적으로 페미니즘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것이다. 여성 과학자들이 고군분투하며 방법론과 개념을 재정립해 나간 흔적이다.

그러나 공식 홈페이지 어디에서도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찾을 수 없다. 쉬빙어 교수는 1980년대부터 페미니스트로서 과학을 비판하며 분석하는 작업을 해왔다. 나는 이번 프로젝트에서 쉬빙어 교수가 과학자 사회를 설득하기 위해 과학의 언어를 쓰며 전략적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을 말하되 '페미니즘'을 말하지 않기. 이런 방식으로 페미니스트는 또 한 번 지워진다. 내가 나를 지우는 꼴이다. 이것은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시대의 반복이 아닌가? 그래도 이렇게라도 하면 설득할 수 있을까? 20대 남성과 나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 우리는 앞으로 60년간은 함께 살아야 한다.


하미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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