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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없는 준법? 실종 장애아들 찾다 구금된 미등록 이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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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없는 준법? 실종 장애아들 찾다 구금된 미등록 이주민

입력
2021.04.30 04: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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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출신 여성, 실종 신고 조사 받다가 구금돼
당국 "적법 절차 따른 것… 풀어주는 재량도 발휘"
전문가 "단속지침에 유엔협약 등 보편인권 담아야"

필리핀 출신 미등록 이주민 A(47)씨가 23일 저녁 7시경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에서 풀려난 뒤 남편 B(54)씨와 발달장애인 아들과 함께 이주민 지원 활동가들에게 설명을 듣고 있다. 이정원 기자

필리핀 출신 미등록 이주민 A(47)씨가 23일 저녁 7시경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에서 풀려난 뒤 남편 B(54)씨와 발달장애인 아들과 함께 이주민 지원 활동가들에게 설명을 듣고 있다. 이정원 기자

필리핀 출신 미등록 이주민 여성 A(47)씨는 22일 오후 큰아들이 다니는 서울 시내 초등학교에서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11세 발달장애 아들이 실종돼 인근 파출소에 신고를 접수했다는 소식이었다. 놀란 A씨는 황급히 파출소를 찾았고, 다행히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아이는 무사히 발견됐다.

그러나 A씨는 다시 찾은 아들을 다음날에야 볼 수 있었다. 실종 신고 관련 조사 과정에서 A씨의 미등록 체류 신분이 밝혀지자 경찰이 '출입국·외국인청 자진 출석 서약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한 것이 시작이었다. 출입국·외국인청의 조사를 받게 되면 여러 날 보호소에 구금될 수 있고, 무엇보다 '불법체류자'로 확정돼 강제 추방될 수 있다. 역시 필리핀 출신인 남편 B(54)씨와 함께 발달장애 두 아들을 키우고 있는 A씨 입장에선 선뜻 수용하기 힘든 요구였다. 서약서 내용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다.

A씨가 "이주민 지원 활동가의 도움을 받고 싶다"며 서명을 거부하자, 경찰은 A씨를 서울 출입국·외국인청에 인계했다. 뒤따라온 활동가들과 담당 변호사들이 사정을 설명하며 항의했으나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A씨는 하룻밤 구금됐다가 다음 달 재출석을 약속하고 23일 저녁 풀려났다. 이 과정에서 B씨는 미등록 체류 사실이 직장에 알려져 해고됐다.

지원단체 항의에 이튿날 풀려나

A씨에 대한 당국의 조치를 두고 미등록 이주민 단속 행정의 적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당국은 적법 절차를 밟았을 뿐이라는 입장이지만, A씨를 돕고 있는 이주민 지원 단체 측은 현행 규정과 집행 과정에 보편적 인권 기준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29일 한국일보 취재에 따르면 단체 측은 장애가 있는 아이를 잃어버려 애태우는 어머니를 미등록 이주민이라는 이유로 구금해 가족과 격리한 건 인권 침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A씨가 이 과정에서 조력 받을 권리를 충분히 보장받지 못했다고도 주장했다. 단체 관계자는 "A씨가 파출소에서 조사를 받을 때 활동가가 동석하려 했는데, 경찰이 조사 관련 서류가 기밀문서라며 입장을 막았다"고 말했다.

당국이 A씨의 사정을 살펴보지 않고 강제 출국에 이를 수 있는 조사를 강행하려 한 것도 문제라고 단체 측은 지적했다. A씨 부부는 2005년경 한국에 건너와 범죄 전력 없이 생활해왔고 한국에서 태어난 두 아들은 모두 자폐성 발달장애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A씨가 한국에서 쫓겨난다면 장애 아동들의 일상이 위협받을 게 자명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조력자들의 지속적 항의와 일부 당국자들의 재량 발휘가 없었다면 A씨가 충분히 강제 출국을 당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단체는 A씨에 대한 조치 과정에 유엔아동권리협약을 등한시했다는 비판도 내놨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비준국에서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 이 협약은 아동 의사에 반한 부모와의 분리를 원칙적으로 막고 있다. 남편 B씨는 "(해고되기 전까지) 내가 일을 나가면 아내 혼자 아이들을 돌봐 왔다"며 "아이들끼리는 등하교도 할 수 없는데 아내가 강제 출국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정말 무섭다"고 말했다.

당국은 "법대로 했을 뿐"이라지만…

경찰과 출입국·외국인청은 "정해진 법과 절차를 따랐다"며 맞서고 있다. 경찰은 A씨를 출입국 당국에 인계한 근거로 '현장 경찰관의 불법체류자 업무처리 지침'이라는 제목의 비공개 내부 규정을 들었다. 경찰 관계자는 "법 집행에 예외를 둘 수 없었다"며 "출입국·외국인청과도 충분히 상의한 후 A씨를 인계한 것"이라고 말했다. A씨에 대한 외부 조력을 막았다는 주장에는 "A씨에게 서명을 요청한 서약서가 실제 기밀문서여서 관련 법규에 따라 외부인 입회를 막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서울 출입국·외국인청 또한 "경찰에서 피의자로 넘어온 이상 다음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이곳 관계자는 "미등록 외국인이라고 해서 곧바로 강제 출국 조치를 하는 건 아니다"라며 "(A씨 사례처럼) 정상 참작 사유가 있고 이를 입증할 자료를 제출하면 주기적 출석을 전제로 보호조치(구금)를 해제해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문가와 시민단체는 당국의 처우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신희석 연세대 법학연구원 박사는 "유엔협약은 미등록 이주민 등 신분과 관계 없이 모두에게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내용"이라며 "이 사건은 더군다나 부모와의 분리가 치명적인 장애아동이 관련돼 있었기에 문제의 소지가 더 커 보인다"고 말했다.

결국 미등록 이주민 가족의 사정이 제도적으로 감안될 수 있는 행정 지침이 마련돼 시행되지 않는 한, 이번처럼 인권 침해 논란이 얼마든지 반복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자캐오 용산나눔의집 신부는 "공무원들이 인권친화적으로 행정재량권을 발휘하기를 기대하지만, 우선은 공무원들이 준수하는 규정 자체가 인도적으로 개정돼 투명하게 집행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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