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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화 얼레지, 7년 만의 외출

입력
2021.04.11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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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지. 조영학 작가 제공

얼레지. 조영학 작가 제공


얼마 전 K와 야생화 취재를 갔을 때였다. 아침 일찍 출발해 강원도 산에서 모데미풀, 동의나물, 얼레지 들을 보고 내려와 산기슭 식당에 들어갔더니 식당 주인이 나물을 커다란 고무대야에 넣고 손질 중이었다. "그게 뭐예요?" 내가 묻자 돌아오는 대답이 "얼레지"란다. 그러고 보니, 넓은 잎의 얼룩무늬가 영락없이 얼레지 잎이다. 산나물 채취는 엄연한 불법이지만 사람들은 마구잡이로 채취하면서도 이렇게나 당당하다. 장사하는 사람한테 한 마디 해야 서로 얼굴만 붉히겠기에 얌전히 식사를 하고 나왔지만 사실 마음이 불편했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얼레지를 보면 영화 '7년 만의 외출'의 마릴린 먼로가 생각나요. 지하철 환풍기 바람에 치마가 올라가는 장면 있죠?" 돌아오는 길에 얘기했더니 K도 고개를 끄덕였다. 얼레지는 맑은 날이면 붉은 꽃잎을 위로 한껏 젖히는데 그 모습이 정말로 바람에 날린 치마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꽃말도 '바람난 여자'다.

얼레지는 깊은 산 계곡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 풀꽃이다. 3월 말이면 활짝 꽃잎을 여는데 군락생활을 하는데다 봄꽃답지 않게 크고 화려한 외모 덕에 등산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매미가 그렇다죠? 7년 동안 땅속에서 지내다가 성충이 된 후 기껏 보름 정도 산다고. 얼레지도 그래요. 씨앗을 떨구고 1년 후에는 꽃대, 2년째는 이파리 하나, 3년엔 이파리 둘, 그렇게 6년을 지내다가 7년째 꽃을 피우죠. 그리고 보름 정도 살다가 떠난답니다. 그런데 꽃을 피우기도 전에 저렇게 뜯어버리고 마네요. 영화 얘기를 꺼낸 건 그래서예요. 7년 만의 외출인 셈이죠."

예전에는 장사치들이 트럭을 몰고 와서 싹쓸이해가는 통에 멸종위기까지 간 꽃이다. 그나마 법 개정과 계몽 덕분에 위기를 면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식물채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지난해에도 정선 어느 너른 암반 위의 정선바위솔들을 누군가 모두 쓸어간 일이 있었다. 마치 고대 왕국처럼 아름다웠던 군락이었던지라 나도 아쉬움이 컸다. "보통 식물을 괴롭히는 부류는 세 종류예요. 예뻐서 집에서 키우려는 사람, 식당주인처럼 먹거리로 여기는 사람, 그리고 약초로 캐어가는 약초꾼들이죠. 얼레지가 미모 때문이라면, 바위솔은 약초라는 이유로 비극을 맞은 셈이죠."

야생화는 오랜 진화의 결과다. 바람, 흙, 빛, 고도 등이 복잡하게 어우러져 생존의 조건을 만들었기에 다른 곳으로 옮겨 봐야 살 확률은 그다지 크지 않다. 예를 들어, 광릉요강꽃, 복주머니란은 수만 원에서 수십만 원에 암거래되지만 난초류는 대부분 공생균류의 도움이 없으면 발아도 발육도 불가능하다. "제일 무서운 사람들이 약초꾼들이에요. 관상용이라면 한두 송이 캐어가지만 약초꾼들은 아예 멸종을 시켜버리거든요. 바위솔, 삽주, 지치, 천마, 삼지구엽초, 백작약 등이 멸종위기에 몰린 것도 다 그래서죠. 그런데도 TV에서는 여전히 산야초 채집을 자랑거리처럼 방영하더군요."

7년 동안의 기다림, 그리고 첫 외출. 식당의 얼레지는 그 설렘도 채 누리지 못한 채 죽어갔다. 동물이 생명이라면 식물도 생명이다. 들꽃의 멸종은 한 송이 꺾는 데에서 시작한다. 굳이 야생화가 아니더라도, 우리 세상에는 예쁜 꽃도 많고 맛난 음식도 몸에 좋은 약도 많다. 부디 산들꽃은 눈으로만 보고 가슴에만 담고 사진으로만 간직하자.



조영학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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