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아리랑 메들리, 이달 초 '바닷바람' 앨범 낸 소리꾼 이희문
국악인, 또는 소리꾼이라고는 믿기 힘든 행색이었다. 지난 11일 서울 서초동에 있는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이희문은 새햐얀 점프슈트에 은색 발토시 차림이었다. 금빛 단발머리에다 눈과 미간 사이에는 정체불명의 은색 반짝이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입술색도 스티커와 '깔맞춤'했다.
스튜디오 한편에 있는 전자기타와 드럼, 키보드 등을 통해 그가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고 추정해볼 수 있겠으나, 경기민요 소리꾼이라는 사실까지 연결 짓기는 쉽지 않다. 전자댄스음악(EDM)이나 비주얼록밴드 가수라면 모를까.
스튜디오는 이희문이 그룹 '오방신(神)과(OBSG)'의 일부 멤버들(OBSG4BS)과 지난달 6일 공개한 음원 '아라리'의 뮤직비디오 촬영장이었다. 이희문은 "오늘은 흰색과 은색을 중심으로 영상을 찍고 있는데, 우상희(사진작가) 감독에게 전체 콘셉트를 맡겼다"며 "놀이하듯 작업하고 있다"고 웃었다. 노래도 노래지만 이희문은 'OBSG' '한국남자' 등 프로젝트를 통해 언제나 파격적인 인상을 선보여 왔다.
이희문과 'OBSG4BS'는 지난달 민요 아리랑을 편곡한 메들리 '아라리'(정선아리랑) '아리아리'(해주아리랑) '아이 고'(자진아리)를 발표했다. 흔히 듣던 선율과 음색이 아니다. 각각 록과 펑크 등이 결합했다. 이희문은 "사실 아리랑의 상징성 때문에 최근까지도 감히 손댈 생각을 못 했다"고 털어놨다. 그럼에도 도전한 이유는 "사람들이 민요를 조금 더 재미있게 즐기면 좋겠다"는 마음에서다.
실제로 '아라리'부터 '아이 고'로 이어지는 8분여 음악에는 예측 불가능한 위트가 담겨 있다. '정선읍내에 물레방아는 물살을 안고 도는데 우리집에 서방님은 날 안고 돌 줄 왜 몰라'(아라리)와 같은 눅진한 가사와 '아리 아리 얼쑤 아리 아리 얼쑤 아~'(아리아리)하는 '루프(일정 마디의 반복)' 방식의 전개가 중독성이 짙다. 이희문이 노린 것도 그 지점이다. "특이해서 들어봤는데 느낌이 좋으면 민요 하나를 알게 된 거죠. 모든 걸 설명하면서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이희문은 이달 6일에도 OBSG와 또 다른 신보를 냈다. '제주나돈데'와 '마량미항'이라는 2개 곡으로 구성된 미니앨범인데, 제목은 'Sea Breeze(시 브리즈ㆍ바닷바람)'다. '제주나돈데'는 제주무가 서우젯소리에서 발전한 영주십경가를 서정적인 통기타 선율에 맞춰 칼립소(서인도제도의 포크 리듬)풍으로 편곡한 노래다. 이희문은 "제주 민요에는 특유의 애잔한 선율이 있는데, 후렴 부분이 특히 좋다"고 했다.
신보 두 번째 곡인 '마량미항'은 전남 강진에 있는 항구 마량항을 소재로 지은 창작곡이다. 탐진강이 바다와 만나는 항구 풍경이 아름다워 제목에 '미(美)항'을 붙였다. 경기민요 '군밤타령'의 후렴구 '바람이 분다'가 지속 반복되며 곡에 등장해 어깨춤을 들썩이게 만든다. 숭어, 민어, 대구 등 물고기를 조선시대 벼슬에 빗댄 가사의 해학도 인상적이다. 이희문은 "우리 민요에도 '휘모리잡가'라는 빠른 말 노래가 있는데 전통 랩쯤 된다"면서 "마량항 어귀에서 생선을 경매하는 풍경을 보고 랩처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이렇듯 이희문은 쉼표 없이 국악의 변신을 꾀하고 있다. 앞서 2015년 국악 팝밴드 '씽씽'을 결성하며 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씽씽'에는 밴드 '이날치' 멤버 장영규(베이스), 이철희(드럼)와 소리꾼 추다혜 등이 있었다. 이희문은 "지난해 시작된 ‘이날치 신드롬’을 비롯해 국악의 인기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비록 각자 가려는 길이 달라 '씽씽'은 해체됐지만, 활동하는 동안 멤버들은 오늘날 하고 있는 음악을 인큐베이팅(배양)할 수 있었던 시간을 축적했다"고 덧붙였다.
요즘 각광받는 국악의 흐름은 파격과 현대적 재해석으로 요약된다. 그 선두에 이희문이 있다. 고주랑 명창의 아들로서 우리 소리를 있는 그대로 지켜야 한다는 부담은 없었을까. "전통 민요를 기록으로 남기며 오랜 시간 공부해 보니 '더 자유롭게 음악을 해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100년 전에도 노래하는 사람은 자유분방했고 창의성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국악을 우리 고유의 모습으로 보전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금은 그 자체가 권력이 돼서 딱딱하고 어려운 장르가 돼버렸죠. 앞으로도 지나치게 올라가버린 전통의 격을 낮추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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