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독립운동가 부인들 "내조 아닌 동등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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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독립운동가 부인들 "내조 아닌 동등한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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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01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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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 중 여성비율 3% 안 돼
"입증자료 부족" 공훈 심사 탈락 일쑤
남편 공적 인정 못 받으면 더 힘들어
옥바라지·경제활동·양육까지 병행
항일 투쟁서 여성 희생 재조명 필요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여사와 그가 남긴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 우당기념관 제공


나날을 굶으며 지내는데, 생불이 아니고서야
어찌 부지할까. 고국에 다시 돌아가서 생활비라도
마련해볼까 하고 떠나서 왔다.

이은숙, 서간도 시종기

56년. '독립운동가 아내'로서의 삶이 곧 독립운동가의 삶이었단 사실을 확인받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우당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은 지난 2018년 국가보훈처로부터 건국훈장인 '애족장' 서훈을 받았다. 1962년 남편 이회영에게 '독립장'이 추서된 지 반세기 만의 일이었다. 당시 서훈에는 이은숙 여사가 1966년 완성했던 회고록 '서간도 시종기'가 큰 역할을 했다. 만주와 북경을 넘나들며 일가의 독립운동을 힘겹게 지탱했던 그의 삶이 회고록에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2018년부터 보훈처의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 작업이 본격화됐지만, 총 1만6,000여명의 전체 독립유공자 중 여성 비율은 여전히 3%를 밑돈다. 독립운동가 부인들의 공적을 뒷받침하는 객관적 자료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번번이 무시되기 일쑤다. 옥바라지와 경제 활동, 자녀 양육을 병행해야 했던 사정이 '형무소 수감'이나 '독립군 참여' 등의 기준 앞에선 넉넉히 인정받지 못하기도 한다.

3·1절을 맞아 한국일보가 만난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은 "망명과 도피를 거듭해야 했던 항일 투쟁이 당시 부인들과 며느리들의 뼈를 깎는 희생 없이 가능했을까"라고 반문한다. 당시 독립 운동은 '가족 단위'로 이뤄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남편을 따라 중국과 만주 등으로 이주한 독립운동가 부인들은 독립운동단체 연락책부터 시작해 임시정부 산하 학교 선생님 등으로 일하며 해방에 기여했다. 기록으로 남지는 않았지만 수입이 없어 홀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기도, 심지어 일제에 붙잡혀 투옥돼 모진 고문을 받기도 했다. 유족들이 "포상은 차치하더라도 이들의 노력을 없던 셈 치지 말아달라"고 당부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3년 옥바라지와 17년의 망명 생활

동암 차이석 선생의 외손주 유기방(66), 유기수(64) 형제가 25일 인천 서구 자택에서 외할머니 강리성 여사의 사진을 꺼내 보고 있다. 맨 왼쪽은 유기방씨의 부인 권기선(68)씨. 이정원 기자

임시정부 파수꾼이자 백범 김구 측근으로 알려진 동암 차이석 선생에겐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 중국 충칭 망명 시절 만나 혼인한 홍매영 여사는 뒤늦게 서훈을 받았지만, 그 전까지 상하이 망명을 함께 했던 첫째 부인 강리성 여사는 남편의 삶을 다룬 평전에 이름 한 번 나오지 않을 정도로 그 존재가 가려져 있다. 차 선생의 외손주들이 지난 2019년 강 여사에 대한 공훈 심사를 요청했으나 보훈처가 내놓은 답은 '입증 자료 미흡'이었다.

차 선생은 1910년 '105인 사건'으로 처음 투옥됐다. 그 손주들에 따르면 이때부터 강리성 여사는 삯바느질로 감옥 안팎의 생계를 꾸려나가며 3년간 고된 옥바라지를 버텼다. 출소 후인 1919년 남편이 임시정부를 따라 상하이로 떠나자, 강 여사도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그 길을 따라 나섰다.

첫째 손자 유기방(66)씨는 당시 외할머니의 삶에 대해 "청사 인근에서 밥집을 하며 임시정부 인사들을 먹이고, 일본영사관 경찰들의 습격과 고문도 홀로 감당해야 했다"고 설명했다. 1939년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옮겨가자 강 여사는 둘째 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강 여사는 1961년 사망 후 후손들의 요청으로 남편이 묻힌 서울 효창원에 합장됐지만, 무덤 앞엔 아직까지 이를 표시한 비문조차 없다.

강리성 여사가 1951년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때의 모습. 유기방씨 제공


임정 교사 이모, 사망 전 "쓸쓸한 노인"

차영애 여사와 진장권 선생의 1935년 결혼식 사진. 가장 위쪽에 서 있는 두 명이 강리성 여사와 차이석 선생. 유기방씨 제공

강리성과 차이석의 첫째 딸인 차영애 여사 역시 해방 후 공적을 인정받지 못하고 홀로 삶을 마무리했다. 차 여사는 1934년부터 임시정부 산하 인성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고 그 기록까지 남아 있다. 그러나 지난 2019년 후손들의 서훈 신청에 보훈처는 "적극적 활동 여부 불분명"이라는 답변을 내놨다. 반면 차 여사와 함께 인성학교 교사로 근무했던 남편 진장권 선생은 독립군 활동 등의 이력이 있어 1990년 애국장 서훈을 받았다.

차 여사는 생전 독립유공자 가족에게 주어지는 경제적 지원조차 받지 못했다. 결혼 당시 찍은 사진도 남아 있었지만, 당시 시댁의 반대로 남편 진장권의 호적엔 올라가지 못했다. 아버지 차이석 선생의 남은 보훈 연금은 이복동생인 차영조씨 앞으로 돌아갔다. 유기방씨의 동생 기수(64)씨는 이모의 삶을 두고 "기록 외의 활동은 무시당했고, 결혼하고도 호적에 올라가지 못했으며, 아들을 우선시하는 과거 보훈 제도 탓에 가난한 생애를 보냈다"며 "가부장적 관습의 총체적 피해자가 우리 이모"라고 눈시울을 붉혔다.

1986년 효창원추모제에 참석한 차영애 여사와 1987년 작성한 탄원서 일부. 유기방씨 제공


차영애 여사는 지난 1987년 3·1절 기념식에 병든 몸을 이끌고 행사장을 찾았다. "아버지를 기억하는 자리에 함께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였지만, 사람들은 그를 문전박대했다. 같은 해 9월 그는 자신을 도와달라며 청와대에 탄원서를 보냈다. "해방날이나 3·1절에도 못 들어가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때 마음이 아팠다"는 탄원서에 답은 오지 않았다. 그는 사망 1년 전 한 지역구 소식지를 통해서야 "독립운동가 차이석의 딸이지만 평생을 홀로 살아온" 노인, "뜻있는 분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한 문장으로 기록됐다.


“남편도 번번이 탈락하는데 부인은...”

박애신 여사(의열단원 김태규 선생 부인)의 손자 김명곤(64)씨와 그의 부인 김정숙(60)씨가 25일 서울 도봉구 자택에서 박애신 여사의 사진을 꺼내 보고 있다. 배우한 기자


별도의 회고록을 남기지 않은 이상, 독립운동가 부인의 공적서는 남편의 행적을 바탕으로 작성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남편의 공적이 인정 받지 못하면 부인의 서훈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의열단 김태규 선생의 손자 김명곤(59)씨는 "사망연도가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세 차례 연속 할아버지 김태규의 서훈 신청을 거절당한 후, 할머니 박애신여사의 서훈까지 거절당했다.

김씨 부부에 따르면, 박애신 여사는 시아버지 김병농 목사와 남편 김태규의 옥바라지를 연이어 했다. 파리평화회의에 기미독립선언서를 전달하는 일에 관여하다가 체포된 김 목사가 1년 형기를 거의 다 채웠을 때쯤 무렵 아들 김태규의 1년형이 확정됐다. 감옥으로 사식과 솜옷을 들이면서 가정을 돌보는 일은 스무살을 갓 넘긴 박 여사의 몫이었다.

김씨는 "증조부 김병농 목사는 서훈을 받았지만, 할아버지의 경우 마지막 행적이 확인되지 않았단 이유로 본인은 물론 할머니 박애신의 서훈도 반려됐다"며 "일반 시민인 후손들이 출생부터 사망까지의 조상 자료를 다 찾아내는 데에 한계가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현재 김씨는 건강이 악화돼 더 이상의 자료 수집과 독해가 어려운 상황이다.


“서훈 기준 바뀌어야”

김희선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 25일 본보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아래 놓인 자료들은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 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배화여고 학생들의 형무소 기록. 배우한 기자


전문가들은 독립운동가 부인에 대한 서훈 기준이 지금보다 확대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투쟁' 전선에 뛰어든 기록을 중심으로 평가하다 보면 서훈을 받을 수 있는 여성들은 극히 일부일 수밖에 없다. '가정'을 지키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들 가운데 이은숙 여사처럼 일생을 회고록으로 남긴 경우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당대 부인들의 폭넓은 지원 활동 역시 사실상의 독립운동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단순히 피해자 보상 차원이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는 차원에서도 독립운동가 부인에 대한 연구와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도 힘이 실린다. 독립운동가 부인들은 남편의 생애에 가려 역사의 주체가 아닌 객체로 머물러왔다. 하지만 실제 치열했던 항일투쟁 뒤에는 기록되지 않은 여성들의 희생이 있었다.

김희선 항일여성독립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당시 시대상에 비춰봤을 때, 남성 독립유공자가 1만6,000명이라면 그에 딸린 최소 1만명 이상의 부인들도 독립유공자여야 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남편 옥바라지에 자식들 교육, 시도 때도 없이 들이닥치는 경찰들까지 한꺼번에 감내하는 것이 당시 독립운동가 부인들의 삶이었다"며 "무장 투쟁이나 감옥살이와 비교해 이들의 삶을 '당연한 내조'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국가에서 동등한 독립운동가로 대우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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