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기관장은 이 사람으로" 내정자 정해진 허울뿐인 공모제

알림

"기관장은 이 사람으로" 내정자 정해진 허울뿐인 공모제

입력
2021.02.21 16:00
수정
2021.02.21 16:06
5면
0 0

임추위 공모→추천 거치지만 형식 불과
"청와대 메시지 내려오면 주문대로 인사"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9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선고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내정자가 있다고 합니다. 면접에는 안 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공공기관 임원직 공모에 지원했던 A씨는 최종 면접을 사흘 앞두고 여권 인사로부터 이같은 메시지를 전달 받았다. 청와대가 낙점한 내정자가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 끈이 닿는대로 수소문을 한 결과 돌아온 답이었다. A씨는 "서류전형을 통과해 최종 3배수 후보자로 선정됐는데 면접은 보지말라는 황당한 경우가 어디 있느냐"며 "그럴거면 애초 공모를 하지 말았어야 하지 않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공공기관 임원직은 정권 교체 시기 대표적 논공행상(論功行賞) 자리로 꼽힌다. 대선 캠프 출신이나 여당 인사 등 정권 창출에 공을 세운 인물에게 포상격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법정구속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도 법정에서 "전 정권에도 있었던 관행"이라고 공공연히 말할 정도였다.

불공정 인사 논란이 계속 나오자,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김대중 정부 시절인 1999년 중앙인사위원회라는 독립기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3급 이상 고위 공무원 채용과 승진을 심사하고, 공공기관 인사가 제대로 이뤄지는지 감사하는 역할을 맡겼다. 김대중 정부 청와대 출신의 한 인사는 "당시엔 중앙인사위가 자체적으로 인적 정보를 수집하고 평가했기 때문에 청와대 개입이 쉽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며 "'이 사람은 안 된다'는 블랙리스트 개념도 당연히 없었다"고 말했다.

내려꽂기 자행…존재가 무색해진 임원추천위원회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2008년 중앙인사위 업무가 행정안전부로 이관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2009년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공공기관 운영법)이 개정되면서 기획재정부 산하 공공기관운영위원회가 설치됐고, 공공기관별로 임원추천위원회(임추위)가 만들어져 임원 선출과 관련한 업무를 맡도록 했다. 임추위가 기관장 등 공공기관 임원 후보자를 공개 모집해 후보자를 추천하면 주무기관장이나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식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일보 자료사진


공공기관 임원직 공모제가 본격 시행된 것이지만, 인사 공정성은 오히려 퇴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임추위 구성의 독립성·투명성이 담보되지 않아 청와대나 주무부처 장관의 입김이 더 세진 탓이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임추위가 장관 사람들로 채워지면 청와대나 여권의 오더도 통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며 "정권의 낙하산 인사 못지 않게, 관료 사회의 자기 몫 챙기기 관행도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 초기 공공기관장을 지낸 한 인사는 "특정 정부 부처에서는 임기가 남은 여러 기관장들에게 우회적으로 사퇴를 종용했다"고 떠올렸다.

김은경 전 장관 판결문에도 청와대와 환경부가 점찍은 인사에게 높은 점수를 주도록 임추위원인 환경부 실·국장에게 지시한 혐의가 적시됐다. 재판부는 이를 두고 "공정한 절차를 거치는 외관을 위해 형식적으로 추천위원을 동원했다"고 판단했다. 정권과 국정운영 철학을 같이 하지 않는 인사를 내치는 '블랙리스트' 못지 않게, 코드 인사를 가능케 하는 '화이트 리스트'가 작동하는 문제도 심각하게 본 것이다.

문 정부도 관행 답습… 관련법에 처벌 규정도 없어

낙하산 인사는 진보·보수와 상관 없는 모든 정부의 문제다. 박근혜 정부에서 민정수석을 지낸 한 인사는 "이 사람을 뽑아야 한다"는 청와대 메시지가 내려오면 아무리 임추위가 있어도 청와대 주문대로 인사가 이뤄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민정수석실 출신의 공직자도 "내려꽂기식 임명이 자행되는 건 과거나 현재나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적폐청산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조차 코드 인사 관행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문을 겪고도 유사한 문제가 반복된다면 정치권력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이 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청와대 출신의 한 야당 의원은 "국민적 신임을 받고 출발한 문재인 정부가 이전 정부의 적폐를 답습하고 있다"며 "제도가 무력화되면 제대로 된 국정운영이 가능하겠냐"고 비판했다.

처벌 조항이 없는 점도 '제2의 환경부 사태'에 대한 우려가 계속 나오는 이유다. 현행 공공기관 운영법에는 임추위 구성과 운영, 공모직 선발 과정에서 비위 행위가 발생할 경우 처벌할 수 있는 벌칙 조항이 없다. 윗선에서 부적절한 임원 임명을 강요해도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별다른 규정조차 없다는 것이다. 공공기관 임원이 직원 채용과정에서 비위를 저지를 경우에만 수사 또는 감사를 의뢰한 뒤 그 결과에 따라 해임할 수 있도록 규정했을 뿐이다. 큰 도둑은 눈감아주고 작은 도둑만 잡을 수 있도록 한 셈이다.

국회에서 이 같은 맹점을 보완하기 위한 입법 시도가 없진 않았으나, 성과로 이어지진 못했다. 20대 국회에서 신보라 당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의원이 임원 추천과 임명을 둘러싼 비위 행위와 관련한 처벌 조항을 담은 공공기관운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으나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21대 국회에서도 관련법은 여전히 공백 상태다.

신보라 전 의원은 "인사 문제는 공정성과 투명성이 담보돼야 하는데, 정권마다 '꽂아넣기식' 인사가 자행되고 있다"며 "공공기관 운영법에 처벌 조항을 담거나, 형사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한슬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