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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꾼ㆍ불쌈꾼 백기완

입력
2021.02.15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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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백기완 소장이 1992년 시위 도중 백골단의 구타에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1972-1991) 열사 1주기 추모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민족사진연구회 제공

백기완 소장이 1992년 시위 도중 백골단의 구타에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1972-1991) 열사 1주기 추모식에서 연설하고 있다. /민족사진연구회 제공

“맨 첫발 /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 목숨을 아니 걸면 천하없는 춤꾼이라고 해도 / 중심이 안 잡히나니 / 그 한발띠기에 온몸의 무게를 실어라” 홍콩 민주화 시위대도 따라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원작 시 ‘묏비나리’ 첫 연이다. 15일 타계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향년 88세)은 이 시가 1979년 ‘YWCA 위장 결혼식’ 주도자로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한 후 무너진 심신을 스스로 다잡기 위해 만든 것이라 말했다. 두려움을 떨친 그 한발띠기가 끝내 ‘언땅을 들어올리고… 역사를 돌리리라’라는 다짐이다. 평생 분단ㆍ독재와의 전선 맨 앞에서 거침없이 첫발을 내딛던 불쌈꾼(혁명가)다운 절창이다.

□ 일제강점기 백범 김구를 도왔던 조부 덕택에 독립 후 어린 백기완은 김구를 만난다. 백범은 그에게 “통일은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던 양심이 하나가 되는 것”이라며 그 뜻을 널리 알리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는 그 뜻이 실현되고, 고향 황해도 은율에 계신 어머니를 다시 만나기를 평생 기다렸다. 백 소장의 맏딸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는 “독재정권 사찰기관이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다그칠 때마다, 아버지는 ‘나는 통일꾼이오’라고 말씀하셨다”고 회고할 만큼 통일꾼은 불쌈꾼과 함께 백 소장을 규정하는 정체성이다.

□ 백 소장은 이름난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1967년 통일문제연구소의 전신 ‘백범사상연구소’를 열기 위해, 백 소장은 부인이 할부로 마련한 딸의 피아노를 팔아버린다. 그리고 울고 있는 딸에게 들려준 전설이 바로 ‘장산곶 매’다. 그는 열렬한 순우리말 지킴이이기도 했다. 2017년 뉴스타파 인터뷰에서 “세계화란 미국 제국주의가 전 세계를 시장구조로 만들어 착취하려는 것이며, 미국말은 바로 그 세계화의 앞잡이”라고 단언했다. 그에게 우리말 지키기는 통일운동이었던 셈이다.

□ 세계화를 적극 활용해 경제 성장을 이룬 21세기 한국 사회 성취를 생각한다면 백 소장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이기 쉽다. 하지만 우리가 이룬 성취는 미 MIT대 경제학자 대런 애쓰모글루의 책 ‘좁은 회랑’이 보여줬듯이 “국가와 시민사회 간 힘의 균형”이 이뤄낸 결과다. 이렇게 성공의 ‘좁은 회랑’에 들어선 나라는 결코 많지 않다. 바로 이 힘의 균형을 위한 한 축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이가 통일꾼ㆍ불쌈꾼 백기완 선생이다.

정영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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