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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가 '보수의 메카'가 된 건, 지역주의 정치 때문이다

입력
2021.02.15 04:3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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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대구

편집자주

진보 정치학자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가 대한민국 곳곳을 다니며 역사적 장소와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는 ‘한국근대현대사 기행’을 매주 월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한다. 코로나19시대 '의미있는 여행'의 안내자가 되고자 한다.

전직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모두 대구 출신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전직 대통령을 지낸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는 모두 대구 출신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아니 이게 진짜란 말이야?” 1971년 5월, 제 8대 국회의원 선거결과를 보고받은 박정희는 분노와 경악이 합쳐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총선결과는 공화당이 승리하긴 했지만 득표율(48.8%)이 야당인 신민당(44.4%)과 별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대구에서 5석 중 무려 4석을 야당이 차지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7년 이상 국회의장을 하고 있던 거물 정치인으로 몇 달 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에 대항해 ‘경상도 대통령론’을 외치며 경상도를 누볐던 자신의 오른 팔 이효상, 또 다른 거물 정치인으로 자신이 아끼던 이만섭 의원 등이 줄줄이 낙방한 것이다.

“박정희가 1년 뒤인 1972년 10월 국회를 해산하고 10월 유신을 단행한 것은 바로 이 선거 결과, 특히 대구의 결과에 놀라 더 이상 선거에 의한 정권유지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대구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치과의사 송필경씨는 유신의 배경을 이처럼 설명한다.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이다.

최근 민주화 흐름에 발 맞춰, 대구시는 4·19 당시 대구지역 고교생들이 제일 먼저 이승만에 반기를 든 2·28민주운동을 '한국민주혁명의 출발점'이라고 자랑하는 선전물들을 명덕역 앞에 설치했다

최근 민주화 흐름에 발 맞춰, 대구시는 4·19 당시 대구지역 고교생들이 제일 먼저 이승만에 반기를 든 2·28민주운동을 '한국민주혁명의 출발점'이라고 자랑하는 선전물들을 명덕역 앞에 설치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대구는 원래 ‘진보도시’였다. 해방정국에서 미군정에 제일 먼저 저항했고, 1956년 총선에서 이승만에 대항해 진보 후보 조봉암을 70%나 찍었다. 조봉암은 서울, 경기, 강원, 충청 등 중부지역에서는 19.8% 득표에 그쳤으나 영호남에서는 37.5%를 득표했다. 특히 대구, 경산, 칠곡에서는 모두 70%이상을 득표했다. 대구는 4·19혁명 당시에도 제일 먼저 거리로 달려 나간 ‘야당도시’, ‘민주도시’였다. 1960년 대통령선거를 앞둔 2월 28일, 야당의 선거강연회에 학생들이 참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요일에도 등교를 하라고 하자 대구 고등학생들이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71년 총선에서도 대구시민들은 다시 한 번 대구가 ‘야당도시’, ‘민주도시’임을 보여줬다. 나아가 통혁당, 인혁당 등 1960-70년대 혁신세력들도 대구가 중심이었고, 한국 노동운동의 불씨가 된 전태일도 대구 출신이었다.

이 같은 대구가 언제부터인가 보수의 대명사가 됐고 이제는 ‘보수의 성지’, 진보세력이 보기에는 ‘수구의 성지’가 되고 말았다. 언제부터, 어떻게 해서 대구는 이처럼 변한 것인가. 이를 체계적으로 추적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의 일이다. 하나의 방법은 선거결과로 이를 추적하는 것인데, 이 또한 쉽지 않다. 1972년 10월 유신이후 박정희는 국회를 해산했고 선거제도 역시 여당은 무조건 1명은 뽑히도록, 한 선거구에서 여러 명을 뽑는 중대선거구제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화에 의해 선거제도가 민주화되는 1987년까지는 선거 결과로 대구가 언제 보수화되기 시작했는지 그 시기를 정확히 추적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를 전제로, 주목할 것은 1985년 총선결과이다. 대구 출신의 전두환 집권 하에 치룬 이 선거에서 대구에서 전두환·노태우의 민정당이 전국적으로 세 번째로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고, 야당인 신민당과 민한당의 득표율(48.2%)이 민정당과 우군인 국민당의 득표율(44.3%)을 따돌렸다. 즉 1985년까지도 대구는 야당도시의 면모를 유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1987년 11월 대선 유세를 위해 대전을 찾은 당시 노태우 후보가 지지자들의 환호에 화답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7년 11월 대선 유세를 위해 대전을 찾은 당시 노태우 후보가 지지자들의 환호에 화답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야성이 사라진 것은 1987년 대선이다. 1987년 대선에서 대구는 노태우에게 70%이상의 표를 몰아주었고, 1988년 총선에서도 전 지역에서 민정당 후보에게 승리를 안겼다. 이를 신호탄으로, 지금까지 30년 이상 이어진 선거 결과들은 일관되게 대구가 ‘보수정당’, ‘보수정치’의 성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2016년 선거에서 민주당의 김부겸 의원 등 2명이 당선되기도 했지만, 지역 출신인 박근혜가 탄핵된 뒤 치러진 2020년 총선에서는 다시 ‘보수정당 싹쓸이’로 귀결되고 말았다.

결국 대구의 보수화는 (1972년 유신이후 서서히 물 밑에서 자리 잡기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87년 대선에서 갑자기 나타나 증폭되고 고착화되어 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대구의 보수화는 ‘지역주의의 부수적 효과’라고 생각한다. 박정희와 김대중이 대결한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효상이 한국 최초의 지역주의 선거 전략인 ‘경상도대통령론’을 들고 나온 것을 시작으로 1980년 광주학살 등을 거치며 지역주의가 강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85년 선거까지는 대구도 지역주의로 투표하지 않고 야당을 밀었다. 87년 대선에서 김대중·김영삼 후보가 분열해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로 치러졌어야 할 선거가 ‘지역대결구도’로 변했고, 노태우 진영 등 대선후보들이 지역주의 전략을 공공연하게 펼치면서 지역주의가 전면화되어 대구 출신인 노태우를 지지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세력이 바로 ‘보수정당’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대구가 보수화되어 보수정당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남이가”라는 지역주의에 의해 지역정당을 지지하게 됐는데, 그 정당이 마침 보수정당이었던 것이다.

박정희의 모교 대구 사범학교의 후신인 경북대학교 부설고등학교에 설치돼 있는 박정희기념비(왼쪽). 항일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동문들을 기리는 순절추모비(오른쪽)와 대비 되며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박정희의 모교 대구 사범학교의 후신인 경북대학교 부설고등학교에 설치돼 있는 박정희기념비(왼쪽). 항일운동으로 목숨을 잃은 동문들을 기리는 순절추모비(오른쪽)와 대비 되며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 과정에서 박정희, 전두환 정권이 호남 출신의 김대중에게 덧씌운 ‘빨갱이론’, 전두환과 노태우가 1980년 광주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호남폭도론’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역주의의 상호작용’ 속에 호남이 그간의 소외와 광주학살 등으로 김대중, 민주당과 일치해 갈수록, 대구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보수정당과 일치되어 간 것이다. 특히 색깔론의 효과로 ‘호남=빨갱이’, ‘대구=대한민국과 자유민주주의의 보루’라는 잘못된 등식을 통해 독재정권과 보수정당을 지지하고 자기정당화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호남의 지역주의가 지역차별과 5·18학살 등에 저항한 ‘저항적 지역주의’라면, 대구·경북의 지역주의는 과거에는 ‘패권적 지역주의’, 1997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는 박정희, 전두환 시절을 그리워하는 ‘패권향수적 지역주의’라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교 건물 현관에 들어가면 박정희의 부조와 '교육자, 혁명가, 위대한 정치인'이란 칭송이 우리를 맞는다.

경북대학교 사범대학교 건물 현관에 들어가면 박정희의 부조와 '교육자, 혁명가, 위대한 정치인'이란 칭송이 우리를 맞는다.

대구는 ‘박정희의 도시’, ‘전두환의 도시’지만, 이들의 가시적인 흔적은 많지 않다. 박정희를 만날 수 있는 곳은 그가 다닌 대구사범학교다. 이제 경북대학교 부설 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뀐 이곳에 가면 기이한 대비를 목격하게 된다. 오른쪽에는 일제에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은 선배들을 기리는 낡은 탑이 있다. 그 옆에는 이들이 목숨을 바칠 때 일왕에서 충성혈서까지 쓰며 일제를 위해 싸운 박정희의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려’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놓은 바위가 자리 잡고 있다. 2005년 동문들이 세운 이 돌 하단에는 “우리 민족의 위대한 영도자이신 박정희대통령의 광대고원(廣大高遠)한 경륜”으로 시작하는 낯 뜨거운 ‘박비어천가’가 쓰여 있다. 박정희가 1971년 지어준 경북대학교 사범대학교 신관 로비에 들어가면 벽에 새겨진 그의 흉상 부조가 미래의 교사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 밑에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성실한 교육자/용기 있는 혁명가/민족중흥의 위대한 정치가’라고 쓰여 있다.

전두환의 모교인 대구공고. 그를 칭송하는 상징물들은 대부분 치워졌지만 그의 글씨를 새긴 대형 기념석들은 남아있다.

전두환의 모교인 대구공고. 그를 칭송하는 상징물들은 대부분 치워졌지만 그의 글씨를 새긴 대형 기념석들은 남아있다.

박정희에 이어 쿠데타로 대통령에 오른 전두환을 만나려면 그의 모교인 대구공고를 찾아가야 한다. 대구공고는 본관 중앙에 전두환의 커다란 초상을 설치하는 등 전두환 미화작업을 하다가 여론의 비판을 받고 그의 초상을 치우는 등 전두환 흔적 지우기에 나섰지만, 그의 글씨를 새긴 대형 기념석 등이 남아있다.

이처럼 모교를 중심으로 작은 흔적들이 남아있을 뿐, 대구에는 광주의 김대중컨벤션센터 비슷한 ‘박정희센터’, ‘전두환센터’ 같은 것이 없다. 구미와 달리 박정희동상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2014년 김부겸 전 의원이 수도권 선거구를 반납하고 고향이지만 ‘적지’인 대구로 내려와 시장선거에 출마하며 박정희컨벤션센터 건립을 공약하자, 지역 출마자들이 박정희 등 대구 출신 전직 대통령들을 기념하는 대통령통합기념관을 설립하자느니, 대구엑스코 이름을 박정희컨벤션센터로 바꾸자느니 하는 제안을 내놓고 있다.

대구 중심가에 박정희동상 같은 상징물은 없지만, 박정희는 대구사람들의 마음속에 신화와 전설로 남아있고 ‘진보도시 대구’, ‘민주도시 대구’를 되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대구를 떠나며, 나는 대구가 ‘진보도시’, ‘민주도시’로 되돌아가지는 못하더라도, 시대착오적인 ‘수구적 보수’가 아니라 ‘합리적인 보수세력’을 지지함으로써 한국 보수의 혁신을, 이를 통해 한국정치의 발전을 주도하기를 빌었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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