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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해고하려 해도…"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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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해고하려 해도…"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입력
2021.01.27 14:48
수정
2021.01.27 14:58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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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이태겸 감독
사무직 여성의 현장 파견 기사 읽고 시나리오 작업
본청과 하청, 사무직과 현장직 조건 다른 노동자들
소통과 진심을 통해 서로를 긍정하는 과정 담아

22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만난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이태겸 감독은 "여러 차례 영화 제작이 무산되면서 밑바닥을 경험하던 중 지방 현장직으로 파견된 사무직 중년 여성에 관한 뉴스를 읽고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고 말했다. 왕나경 인턴기자.

“우리 같은 사람들은 두 번 죽는 거 알아요? 한 번은 낙하, 한 번은 전기구이. 34만5,000볼트에 한방에 가거든요. 근데 그런 거 하나도 안 무서워요. 우리가 무서운 건, 해고예요.”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서 송전탑 정비 하청업체 직원인 ‘막내’ 충식(오정세)이 본청에서 파견 온 정은(유다인)에게 하는 대사다. 정은은 사실상 해고 위기에 몰린 상황. 고소공포증이 있는 그는 충식에게 "사망이든 해고든 뭐가 다르냐"고 되묻는다.

본청과 하청의 차이만큼이나 다른 세계에서 살았던 두 사람은 뜻하지 않게 직장 동료가 되며 서로가 같은 처지임을 알게 된다. 낮엔 송전탑에 오르고 퇴근 후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 새벽에는 대리운전을 하며 딸들을 키우는 충식과 1년만 버티면 회사로 복귀할 수 있을 거라 믿는 정은. 본청 출신이든 하청 소속이든 이들은 직장이 곧 삶이고 목숨과도 같은 사람들이다. 정은이 해고되지 않으면 자신이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충식이 정은을 돕는 이유다.

28일 개봉하는 이 영화를 연출한 이태겸 감독도 일자리가 간절했던 경험이 있다. 회사를 다니다 영화 일을 하겠다며 스스로 박차고 나왔으니 시작은 자발적 이직이었다. 그러나 첫 장편영화 ‘소년 감독’(2007)을 완성하고 난 뒤 10여년간 여러 차례 영화 제작이 무산되면서 사실상 무직 상태로 지내야 했다. 22일 본보와 만난 이 감독은 “두 번째 영화 준비가 어려움을 겪고 있던 차에 우연히 중년 사무직 여성이 지방 현장직으로 파견돼 일하고 있다는 기사를 본 뒤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에서 송전탑 정비 노동자 충식(오정세, 왼쪽)은 본청에서 파견 온 정은(유다인)이 회사와 싸워나갈 수 있도록 돕는다. 영화사진진 제공

투자 문턱까지 갔던 영화가 좌초되는 일을 겪으면서 이 감독은 바닥까지 떨어지는 경험을 했던 터였다. 일주일 넘게 방에서 누워 지낼 정도로 피폐해졌던 시기, 그는 회사를 상대로 외로운 투쟁을 하는 노동자의 이야기에 절로 감정이입이 됐다. 이 감독은 “시나리오부터 일단 써야겠다 싶었는데 한 달 만에 초고가 나왔다”고 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극중 정은의 태도는 감독이 밑바닥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웠던 힘과 같다. 이 감독은 “최악의 상황에 처했을 때 내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다”며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졌을 때 자신을 긍정하는 걸 멈춰선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영화는 본청과 하청 간의 불합리한 억압적 관계와 위험의 외주화, 오로지 효율만을 우선시하는 회사의 비인간적 경영방식, 노노 갈등, 직장 내 성차별 등 다양한 노동 문제를 꼬집지만, 사회 고발이 주목적은 아니다. 서로 다른 조건의 노동자 간의 소통과 진심을 다한 노동을 통해 자신을 긍정하게 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다. 본청과 하청, 회사와 노동자 간의 대립을 선악의 이분법으로 도식화하는 듯한 연출이 약점으로 지적되지만, 다큐멘터리로 연출을 시작한 이 감독은 “현실은 그보다 더하다”고 말했다.

정은은 충식과 함께 일하며 자신이 해온 노동(사무직) 밖의 노동(현장직)을 제대로 응시하게 되고, 노동이 곧 삶이고 생명임을 깨닫는다. 회사가 아무리 자신을 해고하려 해도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을 것’이라는 굳은 의지를, 정은은 그토록 두려워하던 송전탑 위에서 맡은 일을 해내는 것으로써 웅변한다. 정은의 복잡한 심경을 섬세한 표정 연기로 묘사하는 유다인과 삶의 무게에 짓눌리면서도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나가는 충식 역 오정세의 연기가 발군이다. 오정세는 지난해 열린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로 배우상을 받았다.

정은(유다인)은 고소공포증을 극복하고 송전탑에 오른다. 자신을 해고하려는 회사에게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영화사진진 제공


이 감독은 울산 조선소 노동자를 다룬 다큐멘터리이자 첫 연출작인 ‘1984: 우리는 합창한다’부터 줄곧 노동과 인간성 회복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노동 문제를 비롯해 다양한 사회 이슈를 다뤄 온 영국의 켄 로치 감독과 벨기에 다르덴 형제 감독을 존경한다는 그는 “의도했던 건 아닌데 돌이켜 보면 ‘인간적’이라고 말할 때 인간이 가져야 할 최소한의 것은 무엇인가 질문하며 관심을 가져온 듯하다”고 말했다.

두 번째 영화를 내놓기까지 “스스로를 영화감독이라 여기지 않았던” 시간이 너무 길어서였는지 차기작에 대해선 조심스러워 했다. “생각해 놓은 게 있긴 하지만 당분간은 이번 영화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코로나19 시국에 개봉한다고 걱정해주는 분도 있지만 제작 과정 자체가 녹록하지 않아서인지 그것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럽습니다.”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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