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 협력 ...그러나 돈 많이 들면 안 하겠다는 뜻
정치권에 번번이 밀려 불만 고조...별명도 홍두사미
'예산맨' 출신으로 소신 표출하며 조직 달래기
정 총리, 내각 분열 우려에 추가 확전은 자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정세균 국무총리가 지시한 '자영업 손실보상제 법제화'를 논의하겠으나, 과도한 재정 지출에는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재정 지출에 소극적인 기재부를 두고 정 총리가 "이 나라가 기재부의 나라냐"라고 질타하자 '재정 상황을 살펴야 한다'는 평소 소신을 꺼내 들며 우회적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홍 부총리의 이날 발언을 놓고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지난해부터 이어진 당정 간 갈등이 내각 서열 1,2위 싸움으로 번졌다는 해석도 나온다. 다만 홍 부총리가 정 총리의 지시를 이행하겠다는 뜻을 밝힌 만큼 총리실과 기재부 간 추가 확전은 이뤄지지 않는 분위기다.
"재정은 화수분 아니다" ...법제화 우회적 '제동'
홍 부총리는 22일 페이스북에 손실보상제 법제화와 관련해 "‘가보지 않은 길’이라 이에 대해 기재부도 충분한 검토가 필요했다"고 적었다. 이어 "깊이 있게 고민하고 검토할 것"이라며 "영업제한 조치로 어려움을 겪는 자영업자, 소상공인 등을 위한 가장 합리적인 제도화 방안이 무엇인지 부처 간, 당정 간 적극적으로 협의하고 지혜를 모으겠다"고 덧붙였다.
표면적으로는 손실보상제 법제화에 나서라는 정 총리의 지시에 따르는듯 했지만, 홍 부총리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그는 같은 글에서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기 때문에 재정상황, 재원여건도 고려해야 할 중요한 정책 변수 중 하나라는 점을 늘 기억해야 한다"면서 "국가재정이 가장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쓰여지도록 하는 것 등 나라 곳간 지기 역할은 기재부의 권리, 권한이 아니라 국민께서 요청하시는 준엄한 의무, 소명"이라고 강조했다.
이미 잘 알려진 채무 비율을 설명하는 데도 글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며 '속도 조절'을 요구했다. 홍 부총리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은 2020년 당초 예산 편성 시 39.8%로 '40% 논쟁'이 제기되곤 했는데 코로나 위기 대응 과정에서 43.9%로 올랐고, 올해는 47.3%, 내년은 50%를 넘을 전망"이라며 "2024년에는 59% 전후 수준으로 전망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국가채무의 증가 속도를 지켜보고 있는 외국인 투자자, 국가신용등급 평가기관들의 시각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고 적었다.
홍 부총리의 이번 글은 손실보상 법제화에 우회적으로 제동을 건 것으로도 풀이된다. "'가능한 한' 도움을 드리는 방향으로 검토하겠다"는 홍 부총리 말은, 거꾸로 "(재정 여건상) 불가능하면 도움을 못 주겠다"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홍 부총리는 재정을 과도하게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는데, 손실보상제는 그 특성상 막대한 재원을 필요로 한다.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제안에 따라 손실보상제가 시행되면, 소요 예산은 매달 24조7,000억원씩 4개월간 98조8,0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한 번 법제화가 이뤄지면 기준을 쉽게 바꿀 수 없어 장기 재정 운영에 막대한 영향을 준다는 점도 문제다.
'홍두사미', 이번엔 달랐다...입장 차 어떻게 좁힐지 주목
홍 부총리가 여당도 아닌 정 총리에게 이례적으로 뜻을 굽히지 않은 것은 그동안 축적된 불만의 표현일 가능성이 있다. 홍 부총리는 '홍두사미(홍남기+용두사미)'란 별명이 생길 정도로 지난해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 매번 정치권에 끌려다니고 있다.
홍 부총리가 소득 하위 70%를 주장했던 재난지원금은 정 총리 중재를 거쳐 전 국민에게 지급됐고, 기재부가 추진한 주식 양도소득세 대주주 기준 변경은 홍 부총리 사표 논란 속 '없던 일'이 됐다.
예산실 출신으로서 홍 부총리의 소신도 발현된 것으로 보인다. 홍 부총리는 1986년 입직한 뒤 기획예산처 시절 예산총괄과 서기관, 예산기준과장 등을 지낸 대표적인 '예산맨'이다. 정부 사업과 정책을 결정하는 데 있어 예산의 용처, 재정 건전성 등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는 이유다.
여기에 이재명 경기지사 등 대권 주자가 기재부에 맹폭을 날리고 있는 가운데 정 총리마저 기재부를 '콕' 찍어 비판하자 조직의 장으로서 목소리를 낼 필요도 있었다.
다만 정 총리는 이날 홍 부총리의 발언에도 곧바로 질책하지 않았다. 홍 부총리가 기재부 수장으로서 할 수 있는 말을 했다고 보고 일단 눈 감아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추가 설전을 이어갔다가는 내각 내 분란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앞으로 남아있는 손실보상 법제화 과정이다. 자영업자·소상공인이 원하는 수준의 손실보상과 재정당국이 용인하는 예산 지출 간 간극이 클 가능성이 높다. 기재부 관계자는 "손실보상제를 추진하겠다는 방침은 그대로"라며 "이제 막 관련 내용을 알아보고 있어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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