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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비싼 쇼' 위한 경기장, 살려낼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입력
2021.01.18 07:0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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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울월드컵경기장 설계한 류춘수 건축가 인터뷰

편집자주

2002년 한일월드컵 개최를 위해 지어진 월드컵경기장 10곳 가운데 9곳이 올해로 개장 20주년을 맞았습니다. 이 가운데 다수가 사후활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지어져 세금을 축내고, 이젠 프로축구도 못 여는 신세가 됐습니다. 노후화로 이전보다 더 많은 지출이 우려되는 월드컵경기장의 현주소와 대안 등을 3주간 3회에 걸쳐 짚어봅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설계한 류춘수 종합건축사사무소이공 회장이 11일 서울 양재동 이공 사옥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설계한 류춘수 종합건축사사무소이공 회장이 11일 서울 양재동 이공 사옥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서울 마포구 서울월드컵경기장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린다. 개장 20년이 흐른 지금도 대회 유산을 지키면서 시민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는 대표적인 구장이다. 최근 10년 누적 흑자는 약 791억원. 2002 한일월드컵 개최를 위해 국내에 지어진 10개의 경기장 가운데 이젠 수익은 커녕 프로축구 경기도 열리지 않아 ‘세금 먹는 하마’로 전락한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대구스타디움, 광주월드컵경기장, 인천문학주경기장 신세와는 딴판이다.

20여년 전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설계한 류춘수 종합건축사사무소이공(이공) 회장은 11일 서울 양재동 이공 사옥에서 가진 본보와 인터뷰에서 점점 활용도가 떨어지는 구장들이 하루빨리 생존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올해로 대부분 개장 20주년을 맞은 구장들의 유지관리비 상승은 지금까지 쏟아 부은 세금보다 훨씬 커질게 불 보듯 뻔하기 때문. 그는 “늙고 병들면 고치는 비용이 많이 드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경기장도 시간이 더 흐르면 수술(수리)조차 어려워진다”며 “돈(유지비)은 돈대로 들인 뒤 사망선고를 받기보다는 지금부터라도 과감하게 투자해서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주치악체육관을 시작으로 부산 사직구장, 서울올림픽공원, 올림픽 체조경기장 등 국내의 주요 경기장을 설계한 그는 “작은 경기장이라도 시민들이 돈 걱정 없이 수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며 향후 경기장 건설에 대한 방향도 제시했다.

과거 서울월드컵경기장 사진을 배경으로 웃고 있는 류춘수 회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과거 서울월드컵경기장 사진을 배경으로 웃고 있는 류춘수 회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월드켭경기장이 개장 20주년을 맞았지만 대부분 적자다. 세계적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메가스포츠이벤트(월드컵ㆍ올림픽 등)를 치른 경기장들의 고질적 문제다. 세계적으로도 그렇다. 오죽하면 한때 ‘올림픽은 영원히 그리스에서 하자’는 이야기도 나왔을까 싶다. 큰 돈을 들여 갖춘 교통 등 인프라는 시민들이 활용하지만, 월드컵이나 올림픽 대회만을 위해 지어진 경기장들을 활용하지 못하면, 대회 후 더 큰 돈이 들어간다. 경기장 사후활용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지만, 이를 등한시하는 일들이 많았다.”

-부산 대구 광주 인천은 프로축구도 열리지 않아 시민들 발길도 뜸한데, 노후화로 유지보수비는 더 늘어난다.

“사람도 늙고 병들면 고치는 비용이 많이 든다. 병원에 입원시키거나, 큰 수술을 해야 한다. 경기장도 마찬가지다. 활용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는 부산, 대구 등에선 지금부터라도 과감하게 투자해서 고쳐야 한다. 살릴 방법은 투자밖에 없다. 투자를 안하고 미적미적대면 돈만 들고 나중에 돈은 더 들어간다. 방법을 못 찾으면 없앨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이 온다. 일종의 사망선고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더 늦으면 방법이 없다. 주변시설까지 사람들이 가기 좋은 조건이 될 수 있도록 올바른 투자를 고민해야 한다.”

-서울월드컵경기장만큼은 경제성과 시민활용도가 높다. 설계 당시 철학은?

“당시 난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축구도 할 수 있는 거대한 상업시설’이라고 표현했다. 프로팀을 두는 것만으로는 대형 경기장을 운영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축구는 건물의 여러 기능 중 하나인 것이다. 우선 밤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경기장에 영화관 10개관을 집어 넣었고, 쇼핑센터(대형마트)도 만들었다. 이밖에 사우나도 있고 수영장도 있고, 웨딩홀도 3개 갖췄다. 이 상업시설을 월드컵 때는 음료나 스폰서 물품 창고, 프레스센터 등 일시적으로 활용될 공간으로 쓰면 된다는 계획이었다.”

2004년 4월 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서울-부산의 K리그 개막전. 서울이 연고를 옮기고 이곳에서 치른 첫 경기였다. FC서울 제공

2004년 4월 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서울-부산의 K리그 개막전. 서울이 연고를 옮기고 이곳에서 치른 첫 경기였다. FC서울 제공


-축구장 뿐 아니라 공연장으로도 많이 활용됐다.

“공연장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경기장 동쪽 밑을 무대로 활용할 수 있게 설계했다. 고정좌석을 밀면 무대가 나온다. 개장하자마자 경기장 전체에서 오페라 ‘투란도트’ 공연을 했고, 이후에도 콘서트로 많이 활용됐다. 다만 축구라는 상품의 질도 떨어뜨려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원래 (육상트랙이 있는)종합경기장으로 논의되다가 전용구장으로 설계를 변경했다. 축구 선수와 관객하고 가깝게 하려면 육상 트랙이 있으면 안 된다.”

-지속가능성을 먼저 생각한 계기가 있었나.

“1979년 원주치악체육관을 설계할 때였다. 내 나이 30대 때다. 지방에 세워지니 학생이나 대학에서도 빌려 쓰고 싶을 텐데, 전기료 때문에 활용을 못하는 경우가 있을 것 같아서 낮에 하늘에서 햇빛이 들어오도록 환하게 지었다. 그때부터 작은 경기장이라도 시민들이 돈 걱정 없이 수시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설계한 올림픽 체조경기장도 마찬가지다. 1만5,000석 가운데 1층 7,500석은 좌석을 치울 수 있도록 설계해 활용도를 넓혔다. 지금까지 아이스링크로도 쓰이고, 콘서트나 책 전시회, 모터쇼, 복싱 경기장으로도 활용됐다. 초기비용이 조금 들지만 그렇게 해놓으면 활용도가 높다.”

-왜 사후활용에 대한 고민은 설계 때부터 반영되지 못할까.

“월드컵이나 올림픽 등 메가스포츠이벤트를 처음 개최하는 곳의 특징은 국가와 도시를 세계적으로 홍보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전 세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어떤 ‘쇼’를 할 것인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도 이렇게 할 수 있다’고 국력을 과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거다. ‘나중에 어찌되든 간에 일단 하고 보자’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게임이 끝나면 대부분 적자에 허덕이게 된다. 안타깝지만 후진국일수록 더 그래 왔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설계한 류춘수 종합건축사사무소이공 회장이 11일 서울 양재동 이공 사옥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설계한 류춘수 종합건축사사무소이공 회장이 11일 서울 양재동 이공 사옥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왕태석 선임기자


-월드컵 설계 당시 상암동 일대는 ‘쓰레기 산’으로 유명했는데.

“설계를 시작할 당시 서울월드컵경기장 부근은 난지도쓰레기 처리장이 있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서울에서도 가장 낙후된 동네 가운데 하나였다. 하지만 경기장을 촉매로 많이 발전했다. 당시 고건 시장과 협조가 잘됐다. 지금 보면 다른 경기장은 그런 것들이 안 된 것 같다. (활용이 잘 되지 않는)다른 구장도 지금부터라도 바꾸려는 지자체 의지가 필요하다. 돈을 조금씩 들여가며 때우는 식으로 하지 말고, 근본적으로 ‘장사’를 어떻게 할거냐를 고민해야 한다.”

-월드컵 준비 당시 우리나라는 어땠나

“나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올림픽공원과 경기장 5곳의 기본설계를 한 경험이 있다.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1990년 아시안게임이나 2008년 하계올림픽에도 도움을 줬는데, 그 때마다 ‘기술적으로 더 잘할 수 있는 걸 알지만, 대회가 끝난 뒤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더 초점을 맞추라’고 조언했지만 현실은 규모와 외관에 맞춰졌다. 국내에 월드컵경기장을 지을 당시에도 같은 조언을 했지만, (지방자치단체 등에선)당장 건설에 돈이 더 많이 들어간다고 꺼려했다. 지방자치단체장들도 어차피 자기 임기만 끝나면 자기 일이 아니니까 관심이 없는 것이다.”

-향후 메가스포츠 개최 때 고려해야 할 대목은.

“한일월드컵은 한 달에 걸쳐 치러졌지만, 실상 한 경기장에서 많아야 3, 4번 정도밖에 경기를 안 했다. 그 이후의 수익성이 얼마나 있느냐를 따져야 한다. 향후 관리비가 적게 드는 방법과 건물 자체에서 수익이 들어오는 방법 모두를 고민해야 한다. 40~50년이 넘어도 경제적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냐, 사람들이 찾을 것이냐를 꼭 따져봐야 한다.”

김형준 기자
최동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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