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습보다 '인권' 택한 법원... "반인도적 범죄엔 국가면제 적용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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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보다 '인권' 택한 법원... "반인도적 범죄엔 국가면제 적용 안돼"

입력
2021.01.08 22:00
수정
2021.01.12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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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면제는 '관습 vs 보편 가치' 선택의 문제
법원은 후자 택하며 일본에 '배상 책임' 물어
"개인 청구권은 정치적 합의와 무관" 재확인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 소송대리인 김강원 변호사가 8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1심 선고 공판을 마친 뒤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스1

일본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한국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반인도적 범죄의 경우, ‘한 국가의 행위에 대해 다른 나라의 법원이 심판할 수 없다’는 국가(주권)면제론을 적용해선 안 된다고 우리 사법부가 처음으로 내린 판단이기도 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부장 김정곤)는 8일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 할머니 12명이 일본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1인당 1억원씩 배상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했다. 일본 정부가 이날 “한국 법원의 재판권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항소도 하지 않겠다는 뜻을 시사한 만큼, 이번 판결은 항소기한(판결문 송달 후 2주 내)이 지나면 그대로 확정될 가능성이 크다.

이날 법원의 판결은 우리 법원이 ‘일본 정부’의 배상 책임을 사상 처음으로 인정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2018년 대법원에서 원고승소로 확정된 바 있지만, 이번 판결은 기업이 아니라 일본 정부에 책임을 물었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다.

최대 쟁점은 주권면제 적용 여부... 해외서도 찬반 팽팽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에 세워져 있는 고(故) 배춘희 할머니와 세상을 떠난 할머니들의 흉상. 뉴스1

최대 쟁점은 주권면제론의 적용 여부였다. 1998년 대법원이 “국가가 계약의 당사자(사경제주체)인 경우에는 주권면제론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본 판례가 있긴 하나, 위안부 사건처럼 ‘다른 나라가 주권을 행사한 행위’에 대한 사법관할권을 판단한 전례는 없었다. 이번 소송의 결과를 예상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던 이유다.

게다가 주권면제론은 해외에서도 찬반이 팽팽한 사안이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 ‘페리니’ 사건에서 판단이 엇갈린 바 있다. 2004년 이탈리아 대법원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끌려가 강제노역을 한 자국민 페리니가 독일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이탈리아 법원의 관할권을 인정해 원고 승소 판결했다. “누구나 상식적으로 지켜야 하는 보편 원칙(강행규범)을 위반한 국가의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주권면제를 적용해선 안 된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2012년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재판관 12대 3의 의견으로 “이탈리아가 국제법을 위반했다”면서 독일의 손을 들어줬다. 하지만 2년 뒤, 이탈리아 헌법재판소에서 이 판결은 다시 뒤집힌다. 이탈리아 헌재는 “중대한 인권침해에 주권면제를 적용하면 피해자들의 재판청구권이 침해돼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주권면제는 ‘관습’과 ‘인류 보편의 가치’ 중 선택의 문제인 셈이다.

'위안부 손해배상 소송’ 쟁점별 재판부 판단. 그래픽=송정근 기자


'인권' 선택한 法... "주권면제, 국가 배상 회피 위한 것 아냐"

서울 서초동 대법원 대법정 앞에 설치돼 있는 정의의 여신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리고 한국 법원의 이날 판결은 ‘인권’이라는 보편 가치를 선택한 것이다. 재판부는 “주권면제론은 국가가 배상과 보상을 회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해 형성된 게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반인권적 행위에도 주권면제론을 적용한다면, 이를 금지한 다수의 국제 협약에 위반되는 행위를 제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

특히 위안부 사건에서 주권면제론을 적용할 경우, “피해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제대로 구제받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재판부는 강조했다. 그동안 일본이나 미국의 법원이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제기한 민사 소송을 모두 기각하거나 각하한 예를 든 재판부는 “협상력이나 정치적 권력을 갖지 못하는 개인에 불과한 원고들은 이 사건 소송 외에는 구체적인 손해를 배상 받을 방법이 요원하다”고 설명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손배청구권 재확인

윤병세(오른쪽) 당시 외교부 장관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외무장관이 2015년 12월 28일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 외교부 공동사진기자단

일본 정부에게 배상을 요구할 권리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있다는 걸 법원이 인정한 것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재판부는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이나, 2015년 위안부 합의의 적용대상이 아니다”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1965년 협정과 관련, 2005년 8월 노무현 정부 당시 민관 공동위원회는 “일본군 위안부, 사할린 동포, 원폭 피해자 문제 등 3가지는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밝히며 피해자 개인의 청구권은 살아 있음을 확인한 바 있다. 2015년 한일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최종적·불가역적으로 마무리한다’고 합의했으나, 2019년 헌재는 “정치적 합의에 불과하다”며 그 효력을 인정하지 않기도 했다.

결국 위안부 문제와 관련, 한국 법원의 재판 관할권과 피해 할머니들의 청구권을 모두 인정했다는 게 이번 판결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재판부는 위안부 동원 당시의 지속적인 폭행과 그에 따른 상해, 2차 대전 종전 이후의 정신적 상처 등을 언급한 뒤, “이 사건 행위는 반인도적 불법행위이며, 피고가 지급해야 할 위자료는 ‘1억원 이상’이라 봄이 타당하다”고 강조했다.

윤주영 기자
최나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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