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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수호자'의 마중물 되다

입력
2021.01.11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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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브라 화이트 플럼(Debra White Plume, 1954.8.20~2020.11.10)

라코타족 원주민 데브라 화이트 플럼은 10대 말부터 평생 인디언 권익-자존과 환경운동에 헌신한 활동가다. 그는 숱한 소송과 비폭력 시위로 차별과 배제, 자원 착취-환경 파괴에 맞섰고, 안으로는 알코올 중독 극복 등 생활 개선 캠페인도 이끌었다. T셔츠에 적힌 구호 'SOBER INDIAN DANGEROUS INDIAN'을 그는 '스스로 각성해서 처지와 싸우자'는 의미라며, "우리의 무기는 기도와 사랑"이라고 말했다. oweakuinternational.org

라코타족 원주민 데브라 화이트 플럼은 10대 말부터 평생 인디언 권익-자존과 환경운동에 헌신한 활동가다. 그는 숱한 소송과 비폭력 시위로 차별과 배제, 자원 착취-환경 파괴에 맞섰고, 안으로는 알코올 중독 극복 등 생활 개선 캠페인도 이끌었다. T셔츠에 적힌 구호 'SOBER INDIAN DANGEROUS INDIAN'을 그는 '스스로 각성해서 처지와 싸우자'는 의미라며, "우리의 무기는 기도와 사랑"이라고 말했다. oweakuinternational.org


칼 마르크스가 "(만일 그들이 마르크스주의자라면)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 했던 건 소위 '정통'을 자처하던 쥘 게드(Jules Guesde)의 프랑스노동자당을 겨냥한 거였다. 그의 비위를 상하게 한 건 '정통'이란 권위였다. 비판과 자기비판을 사회주의적 삶과 사유의 기본이라 여겼던 그에게 '정통'은 교조의 동의어였다. 무결의 권위-권력에게 비판은 곧 이단이고, 자기비판은 자해다. 정통이 요구하는 건 확신과 맹종 뿐이다. 정통의 세상은 흑과 백, 나와 적으로만 나뉜다. 마르크스는 게드에게서 계급-인간 해방의 미래를 볼 수 없었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 브렛 스티븐스(Bret Stephens)도 최근 칼럼 '집단사고가 좌파를 눈멀게 하다(Groupthink Has Left the Left Blind)'에서 비슷한 말, 즉 오늘날 좌파가 무리 짓기의 자기환상에 빠져 반성적 능력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좌파(The New Left)가 비판과 이견을 통해 진실에 다가가기보다 비판을 배제함으로써 진실을 구성하려 하고, 과정(비판적 방법론)은 무시한 채 결과(권위와 권력)에만 들려 있으며, 사회의 "복잡성(complexity)과 모호성(ambiguity), 회색지대(grey areas)에 주목했던 옛 리버럴 좌파와 달리 "모호함과 회의의 계기들을 인종 계급 젠더 같은 몇 개의 전형적 잣대로 재단"해버리는 "확신의 공장(factory of certitudes)"이 됐다고 지적했다.

스티븐스가 언급한 '전형적 잣대(elements)'들을 뭉뚱그려 칭하는 '소수자(The Minority)'란 말도 사실 너무 편리해서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너무 넓어서 공허하고 너무 좁아서 스스로 갇히기도 한다. 소수- 다수의 모호한 경계, 유동하는 회색 지대를 무 자르듯 자르는 '정통'의 권력을 의심하며 우선은 더뎌도 더듬더듬 촉수를 확장하는 게, 저번 '가만한 당신'의 주인공 버지니아 몰렌코트가 말한 '공감적 상상력(sympathetic imagination)'이 작동하는 방식이었다.

연대의 팔은 아래로 뻗어야 한다

몰렌코트가 구제의 복음을 여성에서 동성애자로, 다시 트랜스젠더라는 더 깊은 차별의 바닥으로 확장해간 힘이 그거였다. 차별의 층위는 층서학적 지층만큼이나 겹겹이고 또 단층으로 얽혀 있지만, 연대의 팔은 곁도 위도 아닌 아래로 뻗어야 한다는 지혜를 그는 삶으로 실천했다. 인권이든 자유든 모든 사회운동의 동력이 확장성에 있다는 것도 그는 알았다. 물론 '여성 해방'을 '인간 해방'의 깃발로 바꾸려는 시도, 'Black Lives Matter'를 'All Lives Matter'의 구호로 대체하자는 주장은 보편을 빙자한 기만이다. 그것은 운동의 확장이 아니라 희석이다. 숙명여대 일부 재학생이 트랜스젠더 여학생 입학 거부 투쟁에 한창이던 무렵 한국성폭력상담소가 낸 성명 '우리는 '자격 없는 여성들과 세상을 바꾼다'가 요청한 바도, 연대의 손을 아래로 뻗자는 거였다.

미국 인종 정치에 맞서온 'Black Lives Matter'는 2012~13년 플로리다의 10대 흑인 소년(Trayvon Martin) 총기 사망과 법원의 백인 범죄자 무죄 선고를 계기로 탄생한 뒤 2014년 퍼거슨 시위와 2015~16년 대선 정국을 거치며 힘찬 정치 구호로 자리잡았다.

그 무렵인 2015년 2월, 미국 네이티브 아메리칸(이하 인디언) 법률 인권단체인 'Lakota Peoples' Law Project'가 'Native Lives Matter'란 제목의 보고서를 냈다. 옥에 갇힌 인디언 비율이 남자는 백인의 4배, 여자는 6배나 높고, 공권력을 비롯한 폭력범죄 희생자는 인구 1,000명 당 흑인이 61명 백인이 49명 아시안이 29명인 반면, 인디언은 124명에 이른다는 사실, 성폭력 등 젠더 범죄에 희생되는 인디언 여성은 미국 평균보다 2배 더 많고, 그 중 88%가 타인종(Non-Native)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미 법무부 통계를 환기한 보고서였다. 그 보고서는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나중에"라는 구호를 방패 삼은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미국 흑인은 전체 인구의 약 14%, 인디언은 1.6%(알래스카- 하와이 원주민 포함)에 불과하다.

'Native Lives Matter'

라코다족 여성 데브라 화이트 플럼(Debra White Plume, 인디언 명 Wioweya Najin Win)은 공권력 폭력, 자본의 인디언 자원 수탈과 환경 파괴에 비폭력으로 맞서며 인디언의 '빵과 존엄'을 지키고자 한 인권운동가다. 그는 부족의 성지를 토막 내고 식수원인 강을 가로지르는 화석연료 파이프라인과 우라늄 채굴에 맞서 광산에서, 백악관 앞에서, 법정에서, 혹한의 사우스다코다 벌판에서 부족을 이끌었다. 하지만 저 싸움들보다 더 그를 지치게 한 건 평생 감당해야 했던 사회적 고립감이었다. 그가 별세했다. 향년 66세.

1968년 전투적 인디언 단체 '아메리칸인디언운동(AIM)'의 리더 데니스 뱅크스를 소개하며, 미국 인디언정책이 상반된 두 기조 즉 부족 공동체 해체- 주류사회 동화와 공동체 유지- 자치권 확대 사이를 오간 역사를 살펴본 바 있다. 인디언보호구역을 정한 1851년의 '인디언 전유법(Indian Appropriations Act)'이 후자의 예라면, 1956년의 인디언 재배치법(Indian Relocation Act)은 전자의 예였다. 미 연방정부는 1871년 3월 전유법을 개정, 인디언 개별 부족과 맺은 기존 조약과 협정들을 전면 무효화하고 연방법이 인정하는 포괄적 자치권만 인정했다. 한 마디로 각기 법적 독립국가의 지위를 인정받던 인디언 부족들은 연방에 속한 단일 자치 집단이 된 셈이었다. 그에 맞선 인디언의 사실상 마지막 집단 저항이자 대규모 학살 사건인 사우스다코다 주 파인리지의 '운디드니 학살'이 1890년 일어났다.

2차대전 이후 냉전기 '비미위원회'의 전횡 속에 인디언 자치권은 더 축소됐고, 1956년의 재배치법으로 공동체 해체도 본격화했다. 연방은 보호구역 재정 지원을 삭감하는 대신 개개인에게 정착금을 지원하며 도시 이주를 부추겼다. 73년 재배치법이 폐지될 때까지 100여 개 부족이 와해됐고, 다수가 청소년이었던 이주민들은 백인 도시의 낯선 환경과 교육, 종교에 적응하지 못해 다수가 도시빈민이 되거나 더 옹색해진 보호구역으로 귀향했다.


라코타족 보호구역 식수원과 부족 성지를 가로지르는 대규모 송유관(Keystone pipeline) 건설에 반대하며 2011년 백악관 앞 시위를 주도하다 연행되는 화이트 플럼. 그는 2016년 다코타 파이프라인 반대 농성과 숱한 소송도 이끌었다. 그의 부족 전통에 따르면 물을 지키는 건 여성의 책임이자 특권이며, 자신은 '물의 수호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AP 연합뉴스.

라코타족 보호구역 식수원과 부족 성지를 가로지르는 대규모 송유관(Keystone pipeline) 건설에 반대하며 2011년 백악관 앞 시위를 주도하다 연행되는 화이트 플럼. 그는 2016년 다코타 파이프라인 반대 농성과 숱한 소송도 이끌었다. 그의 부족 전통에 따르면 물을 지키는 건 여성의 책임이자 특권이며, 자신은 '물의 수호자일 뿐'이라고 말했다. AP 연합뉴스.


데브라 화이트 플럼은 1954년 8월 20일 파인리지 인디언보호구역에서 라코타(Oglala Lakota)족 아버지와 샤이엔(Cheyenne)족 어머니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막노동꾼이었고, 어머니는 주부면서 가정폭력 피해여성 쉼터에서 일했다고 한다. 재배치법에 따라 캘리포니아 산호세에서 학교를 다닌 플럼은 고교를 중퇴하고 귀향해 보호구역 인디언 고교와 대학을 졸업했다. 하지만 60년대 캘리포니아 시민권운동의 이념과 열기를 경험한 뒤였다. 1973년 AIM의 '운디드니 재점거' 당시 주 방위군과 71일을 무력 대치한 인디언 200여 명 가운데 만 19세의 플럼도 있었다.

저 사건 이후 경찰과 보호구역 주민 간 알력은 악화했고, 플럼은 '요주의 인물'이 됐다. 70년대 말 괴한들이 그의 집에 총격을 가해 부상을 입은 적이 있는데, 범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플럼은 위장한 경찰들의 짓이었다고 주장했다.

1988년 부족 남성(Alex White Plume)과 결혼해 운디드니 계곡에 정착, 농사를 지으며 9남매를 돌보던 플럼은 99년 '오웨 아쿠 Owe Aku(Bring Back the Way)'라는 인디언 권익단체를 설립해 활동을 재개했다. 한 해 전 산업용 대마(industrial hemp)를 재배하다 적발돼 송두리째 밭을 훼손 당한 게 결정적 계기였다. 그의 부족은 사실상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hardscrabble existence) 보호구역 내에 약 2만여 명이 산다. 실업률은 85%에 이르고 기대수명은 미국 평균보다 30년이나 짧다. 부족 생존을 위해 부족장이던 남편이 선택한 작물이,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고 고용 효과와 시장성이 좋은 산업용 대마였다. 식용과 섬유 재료로 널리 쓰이는 그 품종은 향정신성 성분(THC) 함량이 적은(0.3% 미만) 산업용이었다. 플럼 부부가 기댄 것은 연방이 부족의 대마 재배를 인정한 1868년 조약이었지만, 마약단속국(DEA)이 단속 근거로 든 것은 1968년의 마약법이었다.

부족 전통의 길로 되돌아가자는 의미의 '오웨 아쿠'는 사실상 식민화에 맞서 공동체를 복원하고, '빵과 존엄'의 권리를 지키려는 단체였다. 부부는 소송을 거쳐 2016년 항소심에서 승리했고, 2018년 미 연방의회는 산업용대마를 전면 합법화했다.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서로에 대한 기도와 사랑이다

http://oweakuinternational.org/

라코타족이 겪는 어려움은 인디언 사회 보편의 문제이자, 흑인 등 소수민족 문제의 확장판이라 할 수 있다. 2010 미국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인디언(알래스카 포함) 27%가 빈곤층이고, 미국 전체에서 1인소득이 가장 낮은 3개 카운티 중 두 곳이 그들이 정착한 사우스다코다의 지바크(Ziebach)와 버팔로(Buffalo) 카운티다. 몬태나 주 블랙풋 보호구역의 주민 실업률은 69%였다.

인디언 여성 성폭력 피해 비율은 미국 평균보다 3.5배 높고, 살해당하는 비율은 10배나 높다. 아동 폭력도 심해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아동 비율은 이라크-아프간 참전 군인과 맞먹는 22%였다. 인디언 전체의 약 1/3인 70만여 명은 과밀 주거환경에 내몰려 있고, 상하수도 시설이 없는 가구도 16%에 달했다. 고교 졸업률은 미국 평균(80%)에 턱없이 못 미치는 67%(2019년 기준)이고, 감옥에 가는 비율도 당연히 높다. 인디언은 사우스다코다 전체 인구의 약 9%지만, 재소자 비율은 29%였다. 투표권 제약도 심해서 보호구역내 주민은 주소 체계가 달라 유권자 등록이 안 되는 경우가 잦고, 투표소에 가려면 100마일 넘게 이동해야 하는 곳도 있다.

거기에 자원 수탈- 환경 파괴가 이어졌다.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연방-주 정부가 인디언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금전적 지원은 없다. 보호구역 토지 이용에 대한 대가, 자원 채굴 계약에 따른 이익 분배가 있지만, 그 계약이 늘 투명하고 공정하진 않다. 특히 환경평가 면에서 인디언은 절대적인 약자다.

2017년 2월 다코타 파이프라인 반대 시위. 그들은 2016년 2월부터 11월까지 스탠딩락 벌판에 텐트를 치고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게티이미지.

2017년 2월 다코타 파이프라인 반대 시위. 그들은 2016년 2월부터 11월까지 스탠딩락 벌판에 텐트를 치고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게티이미지.


화이트 플럼은 인디언 보호구역을 관통하며 캐나다 앨버타에서 네브라스카까지 이어진 1,200마일 송유관 프로젝터 반대 시위로 2011년 백악관 앞에서 체포됐고, 라코타족의 식수원인 강과 호수를 22차례나 넘나들며 조상들이 묻힌 땅을 훼손한 1,172마일 다코타 파이프라인 준공에 항의한 2016년 스탠딩락 보호구역 벌판 텐트 농성을 이끌었다. 우라늄 채광 분야의 세계적 기업(Cameco Co.)과 연방 정부를 상대로 채광지 확대에 반대한 소송의 대표 원고로도 참여했다. 채광 작업은 2018년 이후 중단됐다. 플럼은 2016년 텐트농성 중 'Democracy Now' 인터뷰에서 식수 오염의 실태를 고발하며 "나는 평범한(...) 어머니이고 할머니이고 증조할머니인 라코타 여성"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부족에게 여성은 물을 보호하는 특권과 책임을 지는 존재다. 굳이 나를 규정(label)하고 싶다면, 물의 수호자(water protector)라 불러달라."

'오웨 아쿠'의 알코올 중독 근절 캠페인 구호 '깨어 있는 인디언, 위험한 인디언 Sober Indian, Dangerous Indian)'은 지나치게 호전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Sober는 삶과 운명을 개척할 힘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는 의미"이고, "dangerous는 우리가, 어머니 지구가 더 이상 타인에 의해 휘둘리지 않도록, 인간으로서 라코타로서 여성이자 어머니로서 우리 권리를 지키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전쟁을 하자는 말이 아니다. 굳이 전쟁이라 한다면 현재 우리의 처지와 싸우자는 의미다.(...)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서로에 대한 기도와 사랑이다. 백인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우리만의 무기다." 그를 지지하고 지원한 단체와 활동가들도 물론 적지 않았지만, 그는 더 많은 '이해하는 백인'이 생겨나길 원했다.

그가 세상을 뜬 지 약 한 달 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은 2019년 인디언계 최초로 연방 하원의원이 된 2명 중 한 명인 데브라 "뎁" 할란드(Debra Haaland, 1960~를 내무장관으로 지명했다. 미국 내무부는 광물 등 자연자원과 수로, 토지 및 국립공원 관리 주무부처다. 상원 인사청문회에서 인준을 받는다면 그는, 부족 전통이 아닌 헌법이 권한을 부여한 건국이래 최초의 인디언 여성 '물의 수호자'가 된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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