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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디드 니 학살, 인디언 소탕해 서부개척 美의 ‘상처 난 무릎’

입력
2015.12.2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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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혹함을 보여주는 1890년 운디드니 학살현장
참혹함을 보여주는 1890년 운디드니 학살현장
1973년 운디드니 언덕을 점령, 경찰과 대치한 미국인디언운동 청년회원들.
1973년 운디드니 언덕을 점령, 경찰과 대치한 미국인디언운동 청년회원들.

1890년 12월 29일 미국 사우스 다코다 주 남서부 파인리지 인디언 보호구역내 ‘운디드 니(wounded knee)’언덕. 미국 제7기병대 500여 명의 병사들이 인디언 300여 명을 에워쌌다. 무기를 버리라는 명령에 한 인디언이 저항했고, 어느 편에선지 총 한 발이 발포됐다. 인디언 거의 전원(150명이라는 설도 있다)과 기병대 25명이 숨지는 참극이 그렇게 시작됐다. 대평원 인디언 전쟁 막바지였고, ‘소탕’되지 않은 이들 대다수는 보호구역에 수용된 뒤였다. 전설의 수족 추장 시팅불(Sitting Bull)이 살해 당한 건 10여일 전(12월 15일)이었다.

그 무렵 인디언들 사이에선 ‘유령 춤 Ghost Dance’이라는, 신앙 의식이 유행처럼 확산되고 있었다. 인디언이 궁지에 몰린 것은 전통을 버려 신을 노하게 한 탓이다, ‘유령 춤’을 추고 백인들의 문화를 배격하면 옛 영광을 되찾고 백인들을 물리칠 수 있다, 고 그들은 믿었다. 미국 정부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불온 사상’이었다. ‘운디드 니’언덕의 인디언들이 그들 일부였고, 절반 이상은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기병대는 4대의 기관총을 갖춘 정규 전투부대였다. 인디언 성인 남자 90명 등 290여 명이 숨졌고 5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기병대는 25명이 숨지고 39명이 부상 당했다.

신호탄이 된 한 발을 누가 쐈는지, 정확한 희생자 숫자는 얼마인지 등을 두고 설이 엇갈린다. 하지만 정황상 인디언 측에서 무력 충돌을 도발했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4년 전 리틀빅혼 전투에서 수족에게 참패를 당한 7기병대의 복수심이 저 참극을 낳았다는 설이 유력하다. 저 사건은 평원 인디언 소탕전의 대미였고, ‘유령 춤’도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됐다.

엇갈린 것은 사건을 부르는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정부는 오랫동안 ‘운디드 니 전투(battle)’라고 했고, 인디언들은 학살(massacre)’이라고 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제7기병대원들에게는 22개의 훈장이 수여됐다. 공식적으로 명칭이 정리된 바는 없지만, 이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시와 노래들이 ‘학살’이라고 불렀다.

1973년 2월 27일, 200여 명의 ‘미국 인디언운동(AIM)’ 청년 회원들이 일련의 경찰 강압과 사법 불평등에 항의하며 저 상징적 언덕을 다시 점거했다. 그들은 71일 동안 연방 보안군과 대치했고, 취약한 인디언 인권 문제를 다시 한번 미국 사회에 알렸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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