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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어른이 했는데..." 보금자리서 쫓겨나는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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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은 어른이 했는데..." 보금자리서 쫓겨나는 아이들

입력
2021.01.03 12:0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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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시청, 그룹홈 폐쇄조치에 생이별
"부모 학대·폭력 피해 의지하며 지냈는데…"
반복되는 고통... "행정편의주의 벗어나야"

지난달 10일 폐쇄가 결정된 경기 남양주시 소재 그룹홈에 거주했던 아동들의 모습. 아동들은 입을 모아 "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사이"라고 서로의 관계를 설명했다. 박씨 제공

지난달 10일 폐쇄가 결정된 경기 남양주시 소재 그룹홈에 거주했던 아동들의 모습. 아동들은 입을 모아 "가족보다 더 가족같은 사이"라고 서로의 관계를 설명했다. 박씨 제공

"제 삶이 송두리째 뽑힌 지 3개월째입니다. 가족 품에 돌아가 행복하게 웃을 날이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지난해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한 대학생 박모(20)씨는 몇 개월째 스트레스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4년째 머물렀던 그룹홈(소규모 아동복지시설)이 폐쇄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정든 집과 가족을 잃었기 때문이다.

지난달 7일 박씨가 남양주시청에 제출했던 탄원서 내용 일부. 박씨가 탄원서를 제출하고 사흘이 지나 같은달 10일, 남양주시청은 시설 폐쇄와 전원조치를 최종 결정했다. 박씨 제공

지난달 7일 박씨가 남양주시청에 제출했던 탄원서 내용 일부. 박씨가 탄원서를 제출하고 사흘이 지나 같은달 10일, 남양주시청은 시설 폐쇄와 전원조치를 최종 결정했다. 박씨 제공

경기 남양주에 위치한 한 그룹홈(공동생활가정)은 지난해 9월 중순부터 문을 닫았다. 시설관계자들이 보호아동에게 술을 제공하고 성추행을 했다는 의혹 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조사를 마친 남양주시청은 지난달 10일 시설 폐쇄를 결정했다.

그러나 시설 폐쇄로 벌을 받는 쪽은 어른이 아니라 아이들이었다. 남양주시 결정에 따라 시설이 문을 닫게 되면서 이곳을 자신의 집처럼 여겼던 7명의 아이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수 개월간 강제 전원 조치를 거부했지만, 남양주시측은 '아동복지법'을 근거로 아이들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행법엔 복지시설을 폐쇄할 때는 아동들의 의견을 고려해 전원 조치한다고 돼있지만, 관할 행정관청에선 '아동들의 의견'보다는 '전원 조치'에만 초점을 맞춰 법을 해석하는 탓이다. 아동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에 되려 아이들이 상처를 입고 있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어떻게 집 구해요… 고통은 아이들 몫

그룹홈엔 가정학대로부터 도망쳐 나온 여성 아동 7명이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부모로부터 신체적?정신적 폭력은 물론이고, 성추행까지 당한 아동들이었다. 이들은 지난해 9월 시설이 문을 닫자 한순간에 뿔뿔이 흩어져 3개월간 낯선 시설을 전전하고 있다. 특히 올해 각각 중학교 2학년과 고교 2학년이 되는 자매는 서로 다른 시설로 보내져 생이별까지 해야 했다. 언니와 떨어져 지내게 된 동생 정모(14)양은 극심한 불안감을 호소하다가 최근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고통을 겪은 아이들은 또 있다. 수능을 앞뒀던 고교 3학년 학생은 갑상선 항진증이 재발하면서 입시를 망쳤다. 과도한 스트레스 탓에 일상생활 도중 기절하거나 원형탈모를 얻은 아동도 있었다.

지난해 11월 그룹홈 아동들이 남양주시청앞에서 전원조치를 거부하는 시위를 진행했다. 박씨 제공

지난해 11월 그룹홈 아동들이 남양주시청앞에서 전원조치를 거부하는 시위를 진행했다. 박씨 제공

아이들은 전원 조치를 막기 위해 남양주시청에 수 차례 탄원서를 보내고 시위를 하면서 '가족 같은 친구들과 모여 지내고 싶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시청은 "모든 아동을 한꺼번에 수용할 시설이 없어 쪼개서 지낼 수밖에 없다"는 답변만 되풀이했다. 문제가 된 시설 관계자만 교체하면 안 되냐는 문의에도 "성범죄는 아동복지법상 '시설장 교체'가 아닌 '폐쇄 처분'으로 규정돼 있어 어쩔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오모(20)양은 "시청에서 18세가 넘은 3명은 받아줄 시설이 없으면 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중순부터 전원 조치 예정을 알렸으니 문제 없다는 입장이지만, 학업을 병행하면서 갈 곳을 구하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오양은 "임시시설에서 다가오는 고교 졸업식 때까지는 머물 수 있겠지만, 이후엔 갈 곳을 구해야 한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공동생활가정으로도 불리는 그룹홈은 2019년 말 기준 전국적으로 578개소에 달하며, 시설 한 곳에 7명까지만 머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집 밖으로 내모는 전원 조치 강행 처음 아냐

이처럼 잘못은 어른들이 저질렀는데 아이들이 안정적 주거공간에서 쫓겨나는 일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2월 충북 청주시는 충북희망원을 폐쇄하고 아이들을 전원 조치하려다가 이를 거부하는 아이들과 첨예하게 대립했다. 아이들이 서울 광화문광장과 청와대 앞까지 올라와 두 달 넘게 텐트 생활을 하며 "헤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시위했지만, 귀담아 듣는 어른들은 많지 않았다. 결국 거주 아동 27명은 아동복지시설 10곳으로 흩어져 보내졌다. 충북희망원에서 태어나 계속 살다가 전원 조치된 윤모(17)양은 "어른들이 우리 얘기는 들어주지 않아 상처를 많이 입었고 무력감도 느꼈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 6일, 청주 충북희망원 아동들이 청와대 분수광장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하기 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고아권익연대 제공

지난해 4월 6일, 청주 충북희망원 아동들이 청와대 분수광장 앞에서 1인 시위를 시작하기 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고아권익연대 제공

아이들이 쫓겨나는 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아동복지법상 시설 폐쇄 이후의 당국 조치와 관련해선 명시된 게 없기 때문이다. 아동복지법 시행령 제50조의2는 '아동복지시설을 폐업 또는 휴업하는 경우, 아동에게 충분한 사전 설명을 하고 아동 의견을 고려한 전원조치를 해야 한다'고만 규정돼 있다. 아동복지시설 관리감독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문제 시설을 하루 빨리 폐쇄시켜야 한다는 의견과, 거주아동을 위해 천천히 폐쇄해야 한다는 의견이 충돌하고 있다는 점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용시설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시설을 폐쇄하면 전원 조치나 원래 가정 복귀, 자립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며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행정편의주의 벗어나 아동 보호 취지 지켜야

전문가들은 정부 조치가 지나치게 행정 편의주의적이라고 지적한다. 정익중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아동복지법은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법인데, 이들의 의사와 반하게 주거지를 바꾸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며 "거주 아동에 대한 후속 조치를 제도적으로 보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윤환 고아권익연대 대표도 "아동복지시설을 운영할 땐 무엇보다 아동이 최우선이 돼야 한다"며 "시설 조치가 이뤄질 경우 지자체가 아이들 요구를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혹한 상황에 맞닥뜨린 아이들은 심리적 충격이 크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다 보면 무력감을 느끼고 쉽게 체념하게 된다"며 "문제를 일으킨 시설 관계자만 바꾸고 아이들은 계속 보호하거나, 폐쇄를 하더라도 6개월 이상 충분히 준비기간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다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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