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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독도는 한국 고유 영토' 근거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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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독도는 한국 고유 영토' 근거가 없다고?

입력
2020.12.07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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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고문헌으로도 입증되는 명백한 대한민국의 고유영토이다. 그런데 일본정부는 ‘외무성’ 홈페이지를 통해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가 아니라고 사실을 날조하여 대내외적으로 선동하고 있다.

첫째, 일본정부는 ‘한국이 예로부터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를 인식했다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습니다. 한국측은 조선의 고문헌 “삼국사기(三?史記)”(1145년), “세종실록지리지(世宗??地理誌)”(1454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東?輿地勝?)”(1531년), “동국문헌비고(東?文?備考)”(1770년), “만기요람(萬機要?)”(1808년), “증보문헌비고(?補文?備考)”(1908년) 등의 기술을 근거로 ‘울릉도’와 ‘우산도’라는 2개의 섬을 오래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 ‘우산도’가 바로 현재의 다케시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라고 날조했다. 조선의 고문헌에 등장하는 ‘우산도’는 지금의 독도임에 분명하다. 고문헌에 동해에 울릉도와 우산도 2개의 섬이 존재한다고 명시하고 있지 않는가? 이들 고문헌에 섬의 크기나 위치가 오늘날과 똑같지 않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왜냐하면, 12세기~16세기까지는 과학기술이 발달하지 못했 기 때문이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동국문헌비고”에는 우산도가 지금의 독도임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둘째, 일본정부는 ‘“삼국사기”를 보면 우산국이었던 울릉도가 512년 신라에 귀속되었다는 기술은 있지만 ‘우산도’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또한 조선의 다른 고문헌에 나와 있는 ‘우산도’에 관한 기술을 보면 그 섬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큰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등 다케시마의 실상과는 맞지 않는 점들이 있어 오히려 울릉도를 상기시키는 내용입니다‘라고 날조했다. ‘우산도’라는 명칭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명칭으로써, “신찬팔도지리지”(1432년)에 처음으로 울릉도와 더불어 우산도가 조선영토임을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512년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되었던 그 시절은 무인 고도(孤島)로서 단지 공해와 같은 섬이었기 때문에 그 명칭이 고문헌에 기록될 정도로 중요한 섬이 아니었다.

셋째, 일본정부는 ‘한국측은, “동국문헌비고”, “증보문헌비고” 그리고 “만기요람”에 “여지지(輿地志)”를 인용하여 ‘우산도는 일본이 말하는 마쓰시마이다’라고 기술되어 있어, 우산도가 독도(다케시마의 한국명)인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여지지” 본래의 기술을 보면, 우산도와 울릉도는 동일한 섬이라고 되어 있으며, “동국문헌비고” 등의 기술은 “여지지”에서 직접 올바르게 인용된 것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연구도 있습니다. 그러한 연구에서는, “동국문헌비고” 등의 기술은 안용복이라는 인물의 신빙성이 낮은 진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 또 다른 문헌 “강계고(彊界考)”(1756년)를 근거로 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라고 날조했다. “동국문헌비고”에 인용된 “여지지”는 누가 지은 어떤 고문헌인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지지 본래의 기술을 보면”이라고 하여 자신의 필요로 하는 특정의 “여지지”를 함부로 갖고 와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사실을 날조하는 행위이다.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이라는 사실은 한일 양국의 고문헌에서 확인했다. 고유영토라는 것은 건국과 더불어 타국의 영토가 된 적이 없는 고유의 것을 말한다.

첫째, “삼국사기(三?史記)”(1145년)에는 ‘울릉도에 우산국이 있었고, 이 우산국은 512년에 신라에 복속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울릉도에 사는 우산국사람들은 지금의 독도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두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에 영토로서 삶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동국문헌비고”(1770년)에서는 ‘울릉도와 우산도는 모두 우산국의 영토’라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참고로 일본사람이 살았던 일본의 오키섬에서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독도가 보이지 않아서 고유영토가 될 수 없다.

둘째,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임을 증명하는 최초의 문헌적 증거는 “신찬팔도지리지”이다. “신찬팔도지리지”는 현존하지 않지만, 동일한 내용이 그대로 “세종실록” 지리지에 전재되었다. “신찬팔도지리지”는 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를 포함해서 각도의 지리지를 합쳐 1432년에 편찬되었다. 조선조정이 왜구의 도둑질과 피역(避役)을 위해 도망한 백성들의 울릉도 거주를 막기 위해 울릉도를 비우기 시작한 것은 1403년이다. 이 문헌은 울릉도를 비운 후, 불과 20-30년 지난 시점에 편찬되었다. 따라서 당시 조정은 “울릉도와 우산도가 날씨가 맑고 바람이 불면 두 섬은 서로 바라볼 수 있다”고 하는 영토인식을 갖고 있었다. “신찬팔도지리지”는 기존의 지리지를 답습한 것이 아니고, 우산도, 울릉도 2섬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영토인식을 바탕으로 집필된 것임에 분명하다.

셋째, “세종실록” 지리지는 1454년에 편찬되어 “신찬팔도지리지”보다 22년 후에 편찬되었고, 1403년 울릉도를 비우기 시작한 시점에서 보면 51년의 세월이 지난 시점에 편찬되었다. 울릉도에 사람이 살지 않아 울릉도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실제의 우산도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세종실록지리지”는 최초의 관찬 지리지인 “신찬팔도지리지”를 그대로 답습하여 세종실록의 부록에 첨부한 것이다.

넷째, “고려사” 지리지에는 본론에 울릉도에 관해 ‘지방100리’라고 서술하고, 그 말미에 ‘일설에 의하면’이라고 하여 우산도, 울릉도 2도가 존재한다고 단서를 달았다. 다시 말하면 본섬은 울릉도이고 부속도서로서 우산도가 존재하여 “본래 2섬”이었다고 기록한 것이다. “고려사” 지리지도 “신찬팔도지리지” 내용을 표본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신찬팔도지리지”에 울릉도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우산도에 관한 상세기록이 없어 추정하는 형식으로 기술한 것이다. 따라서 편찬 시기에 대해, 내용적으로 볼 때 “세종실록” 지리지는 1454년에 완성되었지만, “신찬팔도지리지”(1432년)를 그대로 답습하였기 때문에 1451년에 편찬된 “고려사” 지리지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집필되어 비교적 내용이 정확하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는 집필시기가 늦고 “신찬팔도지리지”를 답습하면서도 우산도의 존재에 대해서는 추측성으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다섯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는 본론에 “우산도와 울릉도 2섬은 바람이 불고 날씨가 맑은 날 서로 바라볼 수 있다”라고 하고 부연 설명으로 “일설에 의하면 우산도와 울릉도는 본래 1도”이라고 기록되었다. 시기적으로 “신찬팔도지리지”(1432년)보다 98년 후에 집필된 것이기 때문에 최초의 지리지인 “신찬팔도지리지”를 표본으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가 “일설에 의하면 2도”라고 하여 추측성으로 표기하였기 때문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팔도총도”를 삽입하여 ‘우산도와 울릉도’ 2도를 지도로 그리기까지 하면서도, 표본으로 한 여러 지리지에 우산도에 관한 상세한 기술도 없고, 실제로 확인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그 존재를 의심했던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은 1403년 울릉도 도항을 금지한 후 127년이 지난 시점에 편찬되었고, “신찬팔도지리지”(1432년)보다는 98년이나 지난 시점에 편찬되었다. “신찬팔도지리지”,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2섬의 존재를 명확히 했고, “고려사” 지리지에는 “일설에 의하면 2섬”이라고 추측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가장 오래된 “신찬팔도지리지”를 표본으로 2도의 존재를 기술했지만, 우산도와 울릉도는 ‘동일한 섬’일 수도 있다고 추측하였다. 결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산도는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없어 세월이 지날수록 추측이 난무했지만, 가장 오래된 “신찬팔도지리지”를 표본으로 하여 ‘동해상에 영토로서 우산도, 울릉도 2도가 존재한다’고 기록했다는 점이다.

여섯째, “동국문헌비고”(1770년)는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보다 240년 후에 편찬되었지만, 울릉도와 우산도에 대해 기존의 지리서와는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편찬되었다. “본래 ‘울릉도-우산도’ 두 섬은 우산국의 영토이고, 우산도는 일본이 말하는 송도”이라고 하여 우산도의 위치(울릉도-우산도)나 존재에 대해 아주 명확하게 기술하였다. 그 이유는 1693-1696년 안용복 사건으로 2차례나 일본에 도일했던 안용복에 의해 울릉도와 우산도의 위치나 존재가 명확히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후에 집필된 “만기요람”(1808년), “증보문헌비고”(1908년)는 내용적으로 정확한 “동국문헌비고”를 표본으로 삼아 울릉도, 우산도의 영토의식을 명확히 했다.

일곱째, 일본의 고문헌으로써 최초로 독도가 등장하는 ‘은주시청합기’에는 “일본의 경계는 오키섬까지이고, 그 서북쪽에는 고려의 영토인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가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전근대시대의 1695년 돗토리번, 1696년 막부는 울릉도와 더불어 독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고 했다. 근대시대의 메이지정부도 막부의 인식을 바탕으로 1870년(‘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영토가 된 시말’), 1877년(태정관지령, 기죽도약도) 2번에 걸쳐 공식적으로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영토가 아니라고 명시했다.

이처럼 독도는 울릉도와 더불어 한일 양국의 고문헌이 증명하는 한국의 고유영토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일본 정부는 일제가 침략한 한국의 고유영토 독도에 집착하여 영토적 권원까지 날조해서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우의를 다져야 할 한일 양국의 미래세대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최장근 대구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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