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세라 “걸그룹 4년에 자존감 바닥, 그래도 언니가 돼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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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세라 “걸그룹 4년에 자존감 바닥, 그래도 언니가 돼주고 싶다”

입력
2020.10.30 09:00
수정
2020.10.30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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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58>류세라

‘미쓰백’서 아이돌 생활로 얻은 우울증 고백
“피땀 바쳐도 성공률 희박한 걸그룹 시장
낙오 예정된 99.999% 상처 누가 책임지나”

걸그룹 나인뮤지스의 리더였던 류세라를 26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만났다. 그는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 ‘미쓰백’에서 아이돌 시절 겪은 고통을 고백했다. 홍인기 기자

“사람들이 제가 살아있다는 것만 알아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배웅하러 나선 길이었다. 헤어지기 전 그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 말이 애처롭고 슬펐다.

그는 화려한 무대에서 조명을 받는 아이돌이었다. 한번쯤 들어봤을 걸그룹 나인뮤지스의 리더였던 류세라(33)다. 세계를 무대로 성공가도를 달리는 K팝, 그 중심에 서 있는 아이돌 출신의 이 한마디가 왜 이렇게 외로울까.

아이돌은 화려한 직업이지만, 모든 아이돌이 그런 건 아니다. 나인뮤지스만 해도 걸그룹 전성시대라 일컫는 2010년에 데뷔했지만, 정작 그들은 전성기를 누려보지 못했다. 다 쏟아 붓고도 안 된다는 걸 아는 데 걸린 시간은 4년.

일거수일투족이 점수로 매겨지는 연습생 트레이닝 시스템은 실력은 향상시킬지 모르나, 자존감은 떨어뜨렸다. “너는 비율이 왜 그래(키가 168㎝이나 되는데)” “누가 쟤 (살) 좀 어떻게 해봐(이 소리를 안 들으려면 48㎏ 미만을 유지해야 한다)” 같은 비평은 존재의 당위를 한없이 깎아 내렸다. “나조차도 ‘나는 외모가 왜 이럴까, 나는 정말 부족하구나,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구나’ 싶다가 어느 순간 내가 싫어지더라고요.”

걸그룹을 성 상품으로 여기는 업계의 폐습까지 엄존한다. 아이돌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큰 원인이다. “아, 이런 거는 술 한잔 하면서 봐야 하는데.” 세라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이 한마디에 모든 게 함축돼있다. 소속사 임원이 나인뮤지스의 데뷔곡 ‘노 플레이 보이(No Play Boy)’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에서 내뱉은 말이다. 소속사가 입힌 의상은 속옷인지 겉옷인지 모를 핫팬츠에 가터벨트였다. 페티시즘의 상징인 가터벨트를 의상으로 활용한 건 당시에도 논란이었다. “처음엔 그게 뭔지도 몰랐어요. 가터벨트라는 걸 알고 눈물이 나더라고요. 우리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싶어서.” ‘하의 실종ㆍ가터벨트’라는 단어가 활동 내내 나인뮤지스를 따라다녔다.

그래도 차트 상위권을 경험이라도 해봤다면, 시행착오의 과정으로 여겼을지 모른다. 혹독한 연습생 시절을 버티고, 노이즈 마케팅까지 감수하면서 나간 큰 물엔 더 잘나고, 실력 좋은 그룹이 너무나도 많았다. “피와 땀을 쏟아 부어도 결국 우리는 다른 (상위) 그룹의 그림을 만들어주는 배경 밖엔 안 되는구나.” 자존감은 바닥이 났다.

나인뮤지스를 탈퇴하고 소속사에서도 나온 지 6년, 류세라는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고 있다. 그건 바로 ‘언니 아이돌’이다.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조명 받지 못하는 걸그룹들의 노래를 한국어와 영어로 리뷰하고, 만나서 인터뷰도 한다. 자기라도 나서서 이런 그룹이 있다고 알리고 용기를 주고 싶어서다. 나아가 지옥 같은 현실을 감당하고 있을지 모를 동생들에게 ‘대나무숲’이라도 되어주고 싶다.

TV 예능 ‘미쓰백’ 출연을 마음먹은 이유도 그거다. ‘미쓰백’은 상처만 안고 무대 뒤로 사라진 걸그룹 멤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들이 다시 일어설 ‘인생곡’을 선사한다는 취지의 프로그램이다. “저같이 마음이 병든 후배들이 위로를 받으면 좋겠어요.” 마음의 생채기가 병이 되어 버린 것까지도 공개한 게 그래서다.

이 인터뷰는 그러니까 열정과 노력, 눈물을 갈아 넣어도 성공률이 0.001%인 아이돌 산업에서 살아 남지 못했으나, 살아 남은 류세라의 생존기다.

◇대학 시절 알게 된 ‘무대의 의미’

그는 여성들을 만날 때 특히 곧잘 무장해제가 된다고 했다. 그럴 때 나오는 특징이 고향인 부산 사투리다. 홍인기 기자

-어릴 때부터 꿈이 가수였나요?

“원래는 연기자를 하고 싶었어요. 노래는 잘하진 않았는데 좋아했죠.”

-중ㆍ고등학교를 캐나다에서 다녔더라고요.

“음, 그간 공개적으로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해보고 싶어서 갔다고 했지만, 실은 도피하듯 간 거예요.”

-무엇으로부터요?

“가족 분위기가 굉장히, 아주 굉장히 좋지 않았거든요. 부모님의 불화가 심했어요. 결국 나중에 이혼하셨죠. 집안 분위기가 다정다감하지 않으니까, 어릴 때 견디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캐나다에 보내주지 않으면 밥을 안 먹겠다고 버텼죠. 한 4일쯤 굶었을 거예요.”

‘단식 투쟁’ 끝에 그는 중1때 캐나다 생활을 시작했다. 밴쿠버에서 보낸 시간도 만만치 않긴 마찬가지였다. 아는 사람을 통해 구한 현지 가디언(보호자) 부부에게 사기까지 당했다. 그만 공원에 덜렁 남겨두고 다른 곳으로 도주하듯 이사를 가버린 거다. 영어를 하지 못했던 그는 울며불며 경찰서를 찾아간 끝에 임시 거처에서 지내다가 다른 가디언을 구해 지냈다. 도망가버린 첫 번째 가디언 부부도 찾아내 그들이 갖고 가버린 자기 짐들도 찾아왔다. 그때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영어를 정말 열심히 배워야겠다”고 결심했다. 미지의 곳에서 처음 의지한 어른은 그 모양이었지만, 두 번째 만난 가디언들은 정 많고 따뜻한 이들이었다.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한번도 받아보지 못했다는 그의 말에 “그럼 지금까지 받지 못한 선물, 앞으로도 받아야 할 선물을 다 줘야겠다”며 크고 작은 선물을 챙겨줬다고 한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던 그의 눈망울이 촉촉해졌다.

-학교 생활은 어땠나요.

“정말 독하게 했어요. 인종차별이 심했거든요. 이유 없이 수업시간 내내 ‘고 백 투 차이나(Go back to China)’라면서 제 의자를 발로 툭툭 차는 남자 아이도 있었어요. 지금이야 K팝, K컬처가 전세계로 뻗어나가고 있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이란 나라의 존재를 대부분 잘 몰랐죠.”

-동양인, 특히 한국인은 거의 없었군요.

“그 사회에서 적응하고 또 스스로 보호하려고 럭비도 하고,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클럽 활동도 했어요. 악바리처럼 살았죠.”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한국엔 왜 돌아왔나요?

“집안 사정이 너무 어려워져서요.”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귀국한 그는 집이 있던 부산에서 떨어진 포항의 한동대로 진학했다.

-대학 전공도 영문학이던데, 어떻게 연예인이 된 거죠?

“뮤지컬, 아카펠라, 연극 같은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그때도 우울감이 충만한 시기였는데, 그런 제 안의 감정을 표출하는 방법이 무대 위에 서는 거였나 봐요.”

-왜 우울했다고 생각되나요.

“아마도 가정에서 안정감을 느끼지 못해서 아닐까 싶어요. 캐나다에 가서도 예상치 못하게 버려지는 경험을 하기도 했고요. 늘 제 안에 불안함이 숨어 있었죠.”

-그럼 그 시절 가장 큰 기쁨은 뭐였어요?

“(한참 허공을 보며 생각하더니) 아, 질문이 되게 어려워요. 대학 시절 가장 큰 기쁨… 대학 때도 너무 힘들어가지고요. 아, 그때 (고 김영길) 총장님 덕분에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당시에 종종 도서관을 다니시면서 공부하는 학생들 어깨를 토닥거리면서 수고한다고 격려를 해주셨어요. 마치 ‘아이고, 내 새끼 열심히 공부하네’ 하는 느낌이었죠. 시험기간마다 그러셨던 것 같아요. ‘이런 어른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연기자 되려 무작정 서울로

그는 애초 연기자가 꿈이었다. 엑스트라로 알바를 하던 시절도 있었다. 홍인기 기자

-2010년 데뷔인데 그럼 연습생으로는 어떻게 들어가게 된 거예요?

“어떤 교수 때문에 휴학을 하게 됐어요. 자꾸 제게 학비를 대주겠다, 컴퓨터도 사주겠다면서 개인적으로 연락을 했죠. 느낌이 이상해서 수소문해보니 선배들이 그 교수 조심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휴학까지 한 건가요?

“피하고 싶기도 했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연기로 메인 스트림에 가보자 싶었거든요. 그래서 엄마, 아빠에게 1년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무작정 서울로 갔어요.”

-그때 이미 세라씨에게 무대의 의미가 남달랐군요.

“무대 위에서 편안했거든요. 남의 눈치나 기분을 신경 쓰지 않고 나한테 집중하는 데서 오는 카타르시스가 있었어요. 무대 위에 있을 때만큼은 내가 표현하는 것에만 집중하면 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것 밖에 없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게 아니면 숨 쉬기가 힘들 수도 있겠구나 싶었죠. 제겐 내가 진짜 자유로워질 수 없는 숨구멍이었어요.”

-서울에 올라와서 어떻게 했나요?

“안양의 할머니댁에서 지냈어요. 학원 아르바이트를 해서 일단 돈을 모았고 프로필 사진을 찍어서 연기자 오디션 사이트에 올렸죠. 그리고는 연락이 오는 데마다 다 찾아 갔어요. 보조 출연 알바도 했죠.”

-단역 배우요?

“네, 발만 나오거나 뒤통수만 나오거나 하는 엑스트라죠. 세 달쯤 했는데, 더 이상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뒀어요.”

-이유가 있나요?

“너무 비인간적으로 취급을 하더라고요. ‘이×, 저×’ 같은 욕까지는 괜찮았는데, 어느 날은 감독이 엑스트라 담당자한테 ‘저거 치워’라고 하더라고요. 사람을 물건으로 보는 거였죠. 함께 온 크루 중에는 40, 50대도 있었는데 그렇게 대하는 거예요.”

-그리고 오디션에만 집중했군요.

“네, 그때 연락 와서 간 곳이 젤리피쉬 엔터테인먼트예요. 저는 연기자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노래도 가능하냐고 하기에 한 소절 불렀더니, 가수로 트레이닝 받아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더라고요. 나중에 연기자로 전환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그러겠다고 했죠. 또 다른 이유도 있었고요.”

-뭔데요?

“그때까지 작은 기획사까지 가리지 않고 40여 군데 오디션을 봤거든요. 그런데 3분의 1 정도는 돈을 얼마 내야 한다, 누구랑 밥을 먹어야 한다 같은 이상한 조건을 붙였어요. 그런데 젤리피쉬는 그런 게 없더라고요. 그래서 들어갔죠.”

2008년 초였다. 숙소는 회사 근처 고시원을 잡았다. 연습생 때는 수입이 없으니 학원 강사 알바로 벌어놓은 돈으로 생계를 해결했다. 그러다 젤리피쉬에서 갑자기 걸그룹 데뷔 계획을 철회하면서 스타제국으로 소속이 옮겨졌다.

◇걸그룹 데뷔조로 바뀐 운명

소속사의 제안으로 뜻하지 않게 아이돌 연습생으로 진로를 바꾸면서 그는 일거수일투족을 매달 평가 받는 시스템에 매였다. 홍인기 기자

-스타제국의 연습생 생활은 어땠나요.

“힘들었어요. 지옥 같았죠. 그때 스타제국에서 모델 출신 연습생들 중심으로 ‘모델돌’ 컨셉트로 걸그룹을 준비했거든요. 최종 데뷔 멤버는 9명인데, 50명 정도가 A, B, C팀으로 나뉘어서 트레이닝을 받았죠. 9등 안에 들어야 데뷔조가 되는 거예요.”

-아이돌 양성 시스템이 무척 혹독하다고 하던데요.

“평가 차트를 붙여놓고 점수로 순위를 매겨요. 노래나 춤부터 체중, 매력까지요. 매달 테스트를 해서 데뷔조를 정하는 거죠. 가보니까 중학교 때부터 준비한 연습생들을 당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저는 방송용 댄스나 발성, 아이돌 창법 같은 건 처음 해봤으니까요. 그래서 주말이나 휴일까지 매일 회사에 가서 연습했죠. 그래서 다른 연습생들에게 질투도 많이 당했어요.”

-스스로 실력이 나아지는 게 느껴졌나요?

“네, 아마 그 성취감이 없었으면 견디지 못했을 거예요. 하는 만큼 늘었고, 평가 차트 순위도 바닥에서 위로 올라가는 게 보였죠. 지금 생각하면 아주 비인간적인 차트지만 동기 부여에는 최고였어요.”

그는 처음엔 데뷔조인 A팀에서도 꼴찌였다고 했다. 언제든 다른 멤버로 대체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채찍이 됐다. 그렇게 2년 가까이 연습생 생활을 하고 2010년 8월 ‘노 플레이 보이’로 드디어 데뷔했다.

-데뷔조로 확정되면 트레이닝 강도도 높아지나요?

“하드 트레이닝이 시작되죠. 게다가 업계에서 스타제국이 비주얼로 승부하는 모델돌을 데뷔시킨다는 소문이 나서 기대감도 엄청났거든요. 내부 평가를 할 때는 옆에 얼음물을 담은 대야를 뒀어요. 틀리면 거기에 얼굴을 박아야 했죠.”

-세라씨도 얼음물에 얼굴을 담근 적이 있어요?

“저는 없었어요.”

-그럼 한번도 안 틀렸다는 얘긴데, 그렇게 되기까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어려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인권 의식도 없었고요. 원래 이렇게 하는 건가 보다 하고 떠밀려 흘러간 거죠. 연습생 때는 물론 데뷔하고 나서도 의견을 말할 기회가 없거든요. 회사에서 결정하면 머리를 잘라야 하고, 그런 의상을 입어야 하고, 이름도 바꿔야 하죠. 심지어 그런 결정을 내려주는 걸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예요. 그 수많은 연습생들 중에 선택된 거니까.”

◇교복 입던 멤버에게 가터벨트라니

그는 아직도 심한 노출에 가터벨트까지 착용한 데뷔곡 ‘노 플레이 보이(No Play Boy)’ 무대를 편하게 볼 수가 없다. 홍인기 기자

-‘미쓰백’에서 데뷔무대 때 가터벨트 의상을 보고 충격 받았다는 고백을 했죠.

“네, 콘티 회의 때도 멤버들은 참여를 안 하니까 의상을 피팅할 때 처음 알았어요. 무슨 끈 같은 걸 갖고 오는 거예요. 속으로 ‘이건 뭐지?’ 했죠.”

-이건 어디에, 어떻게 하는 물건인가 싶었겠네요.

“네, 그런데 또 거부하고 싶은 생각을 이기게 하는 게 수치심이에요. 아이러니한 일이죠. 저만 해도 데뷔하고 나서도 끊임없이 제 몸이나 몸무게로 엄청 욕을 먹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나조차도 ‘아, 나 같은 사람한테 입으라고 의상도 맞춰주는데 감사해야지’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가터벨트를 보고도 눈물은 나는데 ‘이거 못하겠다’고 표현은 하지 못한 거죠.”

-아이돌 양성 시스템의 분위기가 서서히 그렇게 만드는 거군요.

“맞아요. 그러니까 가터벨트 의상조차도 충격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과정이죠. 어찌보면, 짜인 틀에 내 몸을 맞추기만 하면 되는 게 아이돌 생활이거든요. 그러니까 (머리를 가리키며) 여기가 아니라 (머리 아래쪽 몸을 가리키며) 여기만 움직이면 되죠. 오히려 그래야 오래 아이돌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처음 그 의상을 입은 게 언제인가요?

“뮤직비디오 촬영 때 까만 의상에 처음 가터벨트를 착장했을 거예요. 고교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막내 멤버들을 보니까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거예요. 얼마 전까지 교복 입고 연습 왔던 애들한테 가터벨트라니. 심지어 당시에 현장에 있던 회사 임원은 ‘아, 이런 건 맥주 한잔 하면서 봐야 하는데’라고 했죠. 우리도 다 귀한 딸들이고 꿈을 담보로 열정을 바친 사람들인데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터벨트 의상은 ‘걸그룹 노출’ 이슈의 중심이 됐다. 결국 방송통신심의위가 선정성 주의 권고 조치를 했다. 아이돌도 가수인데, 노래나 춤보다 의상으로 ‘노이즈 마케팅’이 된 셈이다. 음원 차트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데뷔곡 활동을 마친 소감은 어땠나요.

“음, 오랫동안 내 흑역사로 남겠다는 강력한 필이 왔어요. 하하. 실력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고요.”

◇‘너무 뜨면 어쩌지’ 걱정했는데

그에게 무대는 숨구멍이고, 노래는 안식처다. 홍인기 기자

-나인뮤지스와 함께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달샤벳, 레인보우를 일컬어 ‘나달렌’이라고 부르잖아요. 인지도는 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왜 그런 평가를 받을까요.

“음악방송에서 한번은 1위를 하거나, 아주 크게 이슈몰이를 하거나, 광고가 들어오거나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요. 그걸 누가 정하는지 모르겠지만, 음악방송을 할 때 잘 나가는 그룹이나 가수일수록 대기실이 무대와 가깝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피난민대기소라고 불리는 아주 큰 공용 대기실을 썼어요. 칸막이만 쳐놓고 그 안에서 옷도 갈아입고 모든 준비를 다 하죠. 최선을 다했지만, 우리의 전성기는 없었어요.”

-정말 열심히 준비해서 들고 나간 곡의 반응이 안 좋은 적도 있나요?

“네, 특히 ‘돌스(Dolls)’를 발표하기 전에 저는 걱정이 너무 돼서 잠이 안 올 정도였어요.”

-무슨 걱정요?

“우리가 너무 큰 사랑을 받아서 바깥도 잘 못 돌아다니게 되면 어떡하지 한 거죠. 하하. 그런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더라고요.”

-‘돌스’ 최고 기록이 몇 위였나요.

“14위 정도였을 거예요. ‘건(GUN)’도 정말 잘 준비했지만, 100위권에 한 번인가 들고 바로 빠지더라고요.”

‘돌스’는 발표된 지 7년이 지난 지금도 유튜브에서 ‘칼군무 레전드’로 유명하다. 9명이 하나인 듯 움직이는 안무를 보면 당시 연습량이 짐작된다. 팬들이 20㎝힐에 핫팬츠가 아닌, 운동화에 편한 바지를 입고 춤추는 연습 영상이 더 좋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럴 때 기분은요.

“내 탓인가 보다 했어요. 곡을 잘 소화하지 못했나 보다, 살이 너무 쪘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면 버텨내기 힘들지 않나요.

“결국엔 그런 생각들에 잠겨버린 것 같아요. 탈퇴하고 나서 아무도 저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내 탓을 하고 있더라고요. 저도 나인뮤지스가 잘 되지 않은 이유를 찾지 못했어요.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아이돌 산업을 말하는 건가요.

“네, 너무 많은 그룹이 데뷔를 할 수 있거든요. 데뷔 후의 결과에 대해선 아무도 책임지지 않아요. 진입 장벽이 낮으니 경쟁이 심할 수밖에 없고, 그 싸움에서 누군가는 피가 나고 다리가 잘릴 수밖에 없는데도. K팝이 너무 빠르게 성장하다 보니 급체한 느낌이에요. 아이돌 수가 많으니 방송사에서는 출연 기회를 주는 것 자체를 시혜라고 여기고 ‘갑질’을 하기도 하고요. 잘 나가지 못하는 그룹은 병풍처럼 서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죠.”

일부 전문가들도 아이돌 산업의 과열경쟁을 막을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대중문화 평론가 이승한씨는 최근 칼럼에서 “문화체육관광부가 한 해에 데뷔할 수 있는 그룹의 수를 제한하는 쿼터제를 도입해 시장 공급을 조절하거나, 연습생과 소속 가수를 제대로 지원할 토대가 갖춰진 기획사만 등록을 허가하는 방법이 있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날 왜 이렇게 낳았어” 펑펑 운 이유

자신보다 더 어려운 상황을 견디고 있을 후배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홍인기 기자

-나인뮤지스 활동으로 가장 힘든 건 뭐였나요.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한 거죠. 늘 지적만 받았으니까요. ‘나는 왜 이렇게 못 생겼을까, 나는 왜 이렇게 말을 못할까, 나는 왜 이렇게 예능을 못할까’ 하다가 ‘나는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거예요. 어느 순간에는 엄마한테 ‘엄마, 날 왜 이렇게 낳았어’ 하면서 울었죠. 그렇게 굳건하던 엄마도 나중에는 ‘내가 이렇게 낳아서 미안해’ 하면서 우셨어요. 정말 힘들었죠.”

-자기 자신이 싫어진 거군요.

“네, 그래서 정신적으로 아프고 난 뒤 처음 나온 증상이 밥을 안 먹는 거였어요. ‘내가 뭘 했다고 밥을 먹어’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자존감이 어느 정도 있는 상태에서 연습생을 시작했든지, 활동을 할 때 진작 심리 상담이라도 받았더라면 좋았을 거예요.”

-외모 지적을 굉장히 많이 당했나 봐요.

“네, 키가 작다거나 비율이 좋지 않다는 거죠.”

본인 잘못도 아니거니와 후천적으로 어찌할 수 없는 신체까지 트집을 잡으면 어떻게 견딜까. 심지어 세라의 키는 168㎝인데 작다니.

-다이어트도 혹독하게 시켰겠네요.

“시키지는 않아요. 할 수밖에 없게 만들지. 보통 본인 치수보다 더 작게 의상을 제작하거든요. 그러니까 옷에 몸을 맞추려면 살을 빼야 하는 거예요. 또 나인뮤지스가 거의 공백기 없이 활동을 했기 때문에 1년 내내 다이어트를 했죠. 처음으로 칭찬을 들었을 때 몸무게가 48㎏이었어요. 저는 워낙 뼈대도 굵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 체중을 유지하려면 안 먹는 수밖에 없어요.”

-후회한 적은 없나요.

“포기하고 싶었던 적은 몇 번 있었는데, 후회한 적은 없어요.”

-무대에 서는 일은 좋았다는 뜻이네요.

“네, 행복했거든요. 그래서 지금 더 힘든 것 같기도 해요. 무대에서 카메라와 팬들을 바라봤을 때, 내가 다른 누군가를 신나고 즐겁게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 가능성이 주는 기쁨이 엄청나요. 살면서 느낀 유일한 행복감일 거예요.”

-2014년에 탈퇴했는데, 이유는 뭔가요.

“계약이 끝나는 시기이기도 했고, 내가 여기서 살아남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도 커졌죠. 재계약을 한다면, 저로서는 이런저런 조건을 추가하고 싶었어요. 의상 디자인을 미리 멤버들과 상의한다거나, (교체하지 않고) 멤버를 고정해서 간다거나 하는. 그런데 기사를 보고서야 탈퇴 사실을 알았죠.”

-미리 얘기를 안 해줬다니. 리더였는데요?

“그래서 혼란스럽기도 했어요. 내가 이제 무대에서 사라져야 할 타이밍인가 보다, 재계약 논의할 때 내가 너무 많은 요구를 했나 보다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세라는 팬들 사이에서 ‘나인뮤지스의 혼’으로 불렸다. 그의 탈퇴, 아니 방출은 팬들에게도 충격일 거다.

-이별에도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데요.

“한국에 못 있겠더라고요. 그래서 한달 동안 베트남 여행을 했어요. 기타 하나 들고 집시처럼 살아보자 싶어서요.”

◇“아직도 이런 일이” 후배 걸그룹 하소연에 분통

그는 TV 예능 ‘미쓰백’도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싶기에 출연을 결심했다. MBN 제공

그는 탈퇴 후 홀로 1인 기획사를 만들어 활동을 지속했다. 앨범을 내고 공연도 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주요한 활동이 유튜브다. 유튜브 채널은 운영하는 연예인이 별로 없던 2014년부터 시작해 다른 가수의 곡을 커버하기도 하고, 일상을 공유하기도 했다. 해외 팬을 생각해 한국어와 영어를 함께 쓴 것도 특징이다.

-유튜브에서 후배 걸그룹의 무대를 리뷰하기도 하죠.

“유튜브를 하는 큰 이유예요. 대형 기획사 소속이 아닌 아이돌의 곡을 리뷰하고 인터뷰도 하죠. 가끔 그래서 소속사에서 고맙다고 연락이 오기도 해요. 유튜브가 연결 고리가 돼서 연락하며 지내는 후배들도 많아요. 힘들 때는 언제든 우리 집에 와서 얘기하면 좋겠어요.”

후배들 생각이 났는지 순식간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런 생각으로 시작한 거군요.

“네, 그저 죽고 싶으면 죽고 싶다, 누가 괴롭히면 괴롭다 말이라도 하면 연예인을 하면서 받은 상처로 쌓인 마음의 방어벽이 무너질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언제든 그런 얘기를 들어주는 내가 되고 싶은데, 아직은 제가 (마음이) 성치 못해서…”

그가 울먹였다.

-‘미쓰백’과도 연결이 되네요.

“네,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어서 기뻐요. 후배들을 그렇게라도 돕고 싶어요. 아마 아주 힘든 친구들이 많을 거예요.”

그 자신이 힘들다는 말로는 다 설명하기 어려운 길을 걸어왔기에 자신보다 더 혹독한 현실을 견디고 있을지 모를 후배들에게 마음이 가는 걸 테다.

-실제 찾아온 후배들도 많이 있나 봐요.

“네, 저를 찾으면 기쁘기도 한데, 얘기를 들으면 짜증이 나요. 내가 뭔가 바꿔줄 수 있는 위치가 아니라서. 그래도 말하는 것만으로도 그 친구들 속이 시원해질 수 있다면 그런 장이 되어 주고 싶어요. 아이돌 생활이 정말 정신건강엔 치명적이거든요.”

-지금 세라씨도 치료를 받고 있는데요.

“작년 8월에 티켓이 생겨서 혼자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갔는데 저만 흐느끼면서 울더라고요. 집에 와서는 자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숨이 안 쉬어졌죠. 놀라서 친구한테 전화했더니 공황장애일 수도 있으니 바로 정신과 병원에 가보라고 하더라고요. 지금도 약물 치료와 상담 치료를 병행하고 있어요.”

-어디선가 힘들어 하고 있을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010-××××-…”

-연락을 하라고요?

“(끄덕) 인스타그램에도 이메일 계정이 있으니까 언니한테 바로 연락 줘라! 혼자서 해결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어. 내가 역부족이면 백지영 언니라도 소개시켜 줄게. 손을 뻗어주면 내가 잡아줄게!”

◇백지영에 ‘심쿵’, 송은이에게 자신감 얻어

그는 “늘 꿈꾸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미쓰백’에서 만난 백지영씨는 어떤가요.

“존재 자체로 위로예요! 언니도 많은 시련을 겪었잖아요. 방송을 할 때도 제작진이 제시한 방향에 우리가 주저하면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예전처럼 시키는 대로 다 할 필요 없어’ 하는데, 우와! 심쿵!! 정말 멋있어요.”

-송은이씨도 있고요.

“송은이 언니는 정말 사람 말을 잘 들어줘요. 내가 이렇게 아름답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두 분은 정말 최고예요. 두 분이 진행한다고 해서 출연을 결심하기도 했고요.”

-류세라의 꿈은 뭔가요.

“꿈꾸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아직 내가 뭘 진정으로 원하는지 찾지 못했거든요. 마음의 상처도 많고요. 이게 좀 나아서 건강해지면 꿈꾸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노래는 세라씨한테 어떤 의미인가요?

“집 같은 존재죠. 안정감을 느끼는 것.”

-지금까지 살면서 마음속에서 놓지 않고 지키려고 해온 삶의 도가 있다면 뭘까요.

“우리 할머니한테 배운 건데, ‘진심으로 대하자’예요. 제가 (나인뮤지스) 활동할 때 할머니, 부모님, 방송사 PD, 회사 간부 같은 주위의 어른들한테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게 뭔지 묻고 다닌 적이 있거든요. 알면 삶의 지름길이 생길 것 같아서요. 운이라고 한 분도 있고, 돈이라고 한 분도 있고, 진실이라고 한 분도 있어요. 그런데 할머니가 진심이라고 말하시는 거예요. 평생 사기도 많이 당하시고 그래서 돈도 많이 떼이셨거든요. 그런데 진심이 사는 데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게 마음에 남았어요. 저도 그래서 진심으로 살려고 해요.”

그가 있던 곳은 무한경쟁의 엔터판이다. ‘진심’이 인정 받지도, ‘진심’만으로는 살아 남을 수도 없는 전쟁터였다. 그곳에서 마음을 크게 다친 그의 입에서 나온 ‘진심’이라는 말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느껴졌다. 아이돌로 성공하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확 불타오르지 않았기에 꺼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아닐까. 그가 진심을 무기로, 오래오래 은근하고 따스하게 반짝이는 ‘언니별’이 되기를.

그는 닫힌 마음을 열어줄 힘이 음악에 있다고 믿는다. 홍인기 기자



김지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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