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별세한 고(故) 이건희 회장이 병상에 누워 있던 지난 6년 동안 '이건희의 삼성'은 조금씩 '이재용의 삼성'에 물들어갔다. 생전 이 회장이 염원하던 글로벌 반도체 매출 1위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기도 했고, 삼성그룹 역사상 처음으로 총수가 구속되는 충격적인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 동안 삼성전자 몸집은 두 배 이상 커졌다.
다사다난한 여섯 해를 지나온 이재용 부회장은 올해 5월 드디어 "과거와 다른 '새로운 삼성'으로 거듭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고인이 된 이건희 회장의 과오로 지적되던 무노조 경영과 경영권 편법 승계, 정경유착 등의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였다. 부친을 넘어선 '이재용 호' 삼성의 출범을 알린 셈이다.
'4세 경영'은 없다
이재용의 삼성이 이전과 가장 차별화되는 지점은 '경영권 승계 포기' 선언이다. 이 부회장은 5월 대국민 사과 당시 "저와 삼성을 둘러싸고 제기된 많은 논란은 근본적으로 승계 문제에서 비롯된 게 사실"이라며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라고 못박았다. 부모에서 자녀로 지분과 경영권을 모두 승계해 내려오는 것이 일반적인 주요 재벌가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4세 경영 포기' 발언이었다.
실제로 이 부회장 본인은 아직도 편법·불법 승계 의혹을 받으며 불안전한 왕좌에 앉아 있다. 1995년 61억원 증여로 시작된 이건희 회장의 '승계 작업'은 이듬해 에버랜드의 전환사채 헐값 발행과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증여, 에버랜드(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으로 이어지면서 위태롭게 진행돼 왔다. 지난달 검찰은 2015년 합병이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한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의 '그림'이었다며 이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 관계자 11명을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행위 등 혐의로 불구속기소했고, 이달 22일부터 재판이 시작된 상태다. 이 부회장으로서는 또 다른 편법 승계 방법을 찾기보다는 아예 이를 선제적으로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편이 쉬운 상황이다.
이 부회장의 4세 경영 종식 발언은 이건희 회장의 '인재 경영'과도 맥이 닿아 있다. 이 부회장은 "삼성은 앞으로도 성별과 학벌, 국적을 불문하고 훌륭한 인재를 모셔와야 하고, 그 인재들이 주인의식과 사명감을 가지고 치열하게 일하면서 사업을 이끌어 가도록 해야 한다"며 "그것이 저에게 부여된 책임이자 사명"이라고 강조했다. 과거 삼성이 이건희와 같은 한 명의 카리스마형 리더가 공격적으로 이끌어 가는 기업이었다면, 초일류 기업으로서 덩치가 훨씬 커진 현재의 삼성은 외부에서 영입한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 함께 끌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삼성에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전문 경영인 체제가 자리잡힐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82년 '무노조 경영' 시대 끝내다
이 부회장은 이건희 시대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로 남아 있던 '무노조 경영 원칙'도 직접 깨버렸다. 대국민 사과와 함께 "더 이상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선언하면서다. '이재용의 삼성'이 '이병철·이건희의 삼성'에 작별인사를 고한 순간이었다.
삼성은 "눈에 흙이 들어와도 노조는 안 된다"는 말로 유명한 이병철 전 회장 때부터 무노조 경영을 고수해 왔다. 일부 계열사에 노조가 생긴 적은 있지만, 회사 차원의 조직적인 방해로 제대로 된 노조 활동은 할 수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이상훈 전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과 강경훈 부사장 등이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와해 공작 등에 가담한 혐의로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삼성에서 노사 문제로 전·현직 직원들이 구속된 초유의 사건이었다. 당시 삼성전자와 삼성물산은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겠다"는 입장문을 내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암시했다.
삼성은 2018년 '반도체 백혈병'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피해자 보상안을 내놓기도 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의 직업병 문제가 불거진 지 11년 만이었다. 이 부회장은 반도체 백혈병 논란과 관련한 조정위원회의 중재안을 내용 불문, 수용하겠다고 밝히면서 '이건희의 삼성'이 안고 있던 과거 노동 관련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청산해 나가기 시작했다.
두둑한 실탄...새롭게 M&A 나설까
재계는 이 부회장이 명실상부한 삼성의 '주인' 자리에 올라서면서 미래 산업 초석을 굳건히 다지기 위한 적극적인 인수합병(M&A)을 진행해 나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삼성은 이 회장이 2014년 쓰러진 이후 약 2년간 공격적인 M&A를 진행했지만, 국정농단 사태로 이 부회장이 재판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를 잠시 멈춘 상태다. 삼성전자는 2015년 미국의 모바일 결제 솔루션 업체 '루프페이'를 인수해 '삼성페이'로 재탄생시켰고, 2016년에는 미국의 전장 및 음향기기 기업 '하만'을 9조원대에 인수하는 '빅딜'을 진행한 바 있다.
실탄은 충분하다. 올해 상반기 기준으로 삼성전자의 현금 보유액(현금 및 현금성 자산, 단기금융상품)은 총113조444억원 수준으로, 국내 기업 중 단연 최고다. 이 부회장이 그 동안 4차 산업혁명 기술인 △시스템반도체 △인공지능(AI) △전장 부품 △퀀텀닷(QD) 디스플레이 △5G △바이오 등에 꾸준히 관심을 보여온 만큼, 다음 M&A는 이 분야들에 투자될 확률이 높다. 특히 삼성전자가 지난해 시스템 반도체 육성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선언하면서 이 분야의 대형 M&A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다만 이 부회장에게는 아직도 '사법 리스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26일 9개월 만에 재개된 이 부회장의 국정농단 뇌물죄 파기환송심이나 22일 새로 시작한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재판 등 현재 받고 있는 재판만 두 가지다. 이 부회장이 거의 4년 동안을 피고인 신분으로 지내고 있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 부회장과 관련된 여러 불확실성이 해소되고 공격적인 경영 활동이 재개된다면 진정한 '이재용의 삼성'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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