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별을 고를 수 있는 세상,모두 남성을 택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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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을 고를 수 있는 세상,모두 남성을 택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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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3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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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영 소설집 '얼마나 닮았는가'

'얼마나 닮았는가'. 김보영 지음. 아작 발행. 384쪽. 1만4,800원


모든 역사에는 계보가 있다. 김초엽, 천선란, 문목하 등 걸출한 신예 작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새 역사를 써나가고 있는 한국 SF도 예외는 아니다. 그 계보의 가장 앞선 자리에, 그리고 가장 마지막 자리에 모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작가가 김보영일 것이다.

2004년 제1회 과학기술 창작문예 중편부문에서 수상하며 데뷔한 이후 한국을 대표하는 SF작가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며 이후 여러 신진 SF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SF소설 앤솔로지 기획에 참여하며 한국SF 시장을 넓히는 데도 기여해왔다.

최근 출간된 소설집 ‘얼마나 닮았는가’는 과작으로도 유명한 작가가 ‘진화신화’ 이후 11년만에 낸 새 소설집이다. 미국 최대 출판사 하퍼콜린스와 영국 하퍼콜린스에 한국 SF작가로서는 처음으로 개인 소설집 출간 계약을 맺는 등 느리지만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겨온 작가의 지난 10년 간의 성취가 한 권에 담겼다.

이번 소설집에는 제2회 SF어워드 중단편부문 우수상을 수상한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 제5회 SF어워드 중단편부문 대상을 수상한 ‘얼마나 닮았는가’ 등을 비롯해 작가의 초기작에서부터 근작까지 총 10편의 중단편 작품이 실렸다. 이산화탄소 포집 기술에서부터 합성신체, 언어학, 중국의 요순설화, 태양계까지 소재의 한계에 얽매이지 않는 상상력이 거침없이 뻗어나간다. 그러나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기술을 빌려올지라도 그 기술이 발 딛고 있는 풍경은 지극히 오늘날의 현실이다.


김보영 작가는 “가장 SF다운 SF를 쓰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아작 제공


단편 ‘빨간 두건 아가씨’는 합성신체를 통해 자신의 성별을 택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린다. 어느 누구도 ‘손해보지 않는’ 신체를 원하기에, 세상은 자연히 ‘남자들’만 가득 찬 세상이다. 수험생은 입시철에 남자로 갈아타고, 교수가 되려는 사람들도 남자로 갈아탄다. 직장인들은 연봉협상과 정리해고 시즌이면 줄줄이 남자가 되고 부잣집 아이들은 재산을 물려받으려 남자가 된다.

“이러다가는 세상이 망한다”며 여자가 되기를 종용하지만 그 중 진짜 스스로 여자가 되기를(혹은 여자로 남기를)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세상의 절반인 여자들을 영원히 약자로 남겨두었을 때, 그리하여 세상에 남자들만 남게 되었을 때 그 세상이 어떤 방식으로 끔찍해질 수 있는지 상상해보게 만든다.

시간여행이 가능해진 미래 역시 마찬가지다. 단편 ‘0과1사이’는 시간여행기가 상용화됐지만, 미래에 가서도 여전히 과거를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자신들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그대로 갖고 미래로 간 사람들은 바뀐 미래에 적응하지 못한다. 대학 등급이 사라진 미래에서도 대학에 안 가면 사람 취급 못 받는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입시교육과 모의고사를 부활시킨다. “자신이 경험한 것이 모두 지나간 시대의 것인 줄 모르는” 어른들은 미래의 아이들에게 “낡고 고루한 가치관을 강요”한다. 소설은 더 나은 미래의 규칙을 거부한 채 과거를 고집한다면 그 희생은 아이들이 감당하게 되리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외에도 초능력을 가진 히어로들이 자신의 삶을 희생해 타인을 구하는 데 익숙해진 나머지, 스스로의 힘으로 세상을 더 낫게 만들기를 포기해버린 인간들(‘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 인간보다 유연하게 사고하는 AI와 우주 어디든 갈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신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자의 인격만을 겨우 상상할 수” 있기에 오늘날의 공고한 차별과 배제의 역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미래(‘얼마나 닮았는가’)까지. SF가 허무맹랑한 ‘공상’ 소설일 수 없는 이유를, 미래라는 거울을 통해 현재를 비춰보게 만드는 김보영의 소설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 거울 속 풍경을 바꿀 수 있는 힘은 현재의 인간들에게 있다는 믿음과 희망도.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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