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넷플릭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칼럼니스트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연재됩니다. 한국일보>
2015년, 도널드 레이 폴록의 소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를 읽었다. 표지에는 수상 이력이 가득 적혀 있었다. 대단한 건 아니고 프랑스와 독일에서 범죄소설에 주는 상 정도. 그보다 눈길을 끈 문구는 '퍼블리셔스 위클리'와 '에스콰이어' 등에서 강력 추천했다는 정보였다. 유력한 매체에서 주목했다면, 재미도 있겠지만 나름 시대정신 같은 것을 건드리지 않을까 싶었다.
작가의 이력이 매력적이었다. 작가를 꿈꾸며 대학에서 창작론을 배우고 습작을 하다가 자연스레 등단하는 통상의 코스를 따르지 않았다. 소설에도 등장하는 도시 녹켐스티프에서 태어났고, 고등학교를 중퇴한 후 제지공장 노동자와 트럭 운전기사로 32년간 일했다. 항상 술과 마약에 찌들어 있었다고 한다.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몸 상태가 되자 재활 치료를 받으며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뒤늦게 오하이오 주립대에 들어가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석사 과정을 밟으며 단편집 '녹켐스티프'를 썼고, 장편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를 2011년 발표한다.
흔히 하는 말로, 자신이 살아온 것만 글로 써도 대하소설이 나온다고 떠벌리는 이들이 있다. 보통은 그렇지 않다. 사소한 일상을 파고들어 빛나는 순간을 캐내는 것도 매력적이지만 그도 하루 이틀이다. 극적인 사건, 눈이 휘둥그레질 스펙터클한 광경을 마주하는 건 일반인에게 희박한 경우다.
우연처럼, 기적처럼 갑자기 몰락하거나 성공하는 누군가가 있지만 대체로 남의 일이다. 현실은 픽션보다 비합리적이고 인과성도 제대로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흐름을 잘 포착하여 매끈하게 이어내고 살을 붙이지 않는다면. 일반적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리 재미있지 않다.
도널드 레이 폴록의 삶은 매우 궁금했다. 작가로 데뷔하기 전, 그의 삶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 물론 작가와 작품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작가의 이력, 내면이 작품을 만들어내는 토대인 것은 분명하지만 얼마든지 거짓과 허위, 화려한 장식이 씌워져 있을 수 있다. 허세와 위선으로 가득 찬 작품들도 부지기수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에는 다양한 범죄가 등장한다. 폴록이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살면서 보고 들은 것이 작품 속에 녹아들어갔을 것은 분명하다. 블루칼라 노동자로 일하면서, 술과 마약에 절어 지내면서 그는 무엇을 어떻게 경험했을까.
소설가인 트루먼 카포티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을 거둔 후, 요즘 말로 하자면 ‘셀러브리티’가 되었다. 모든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친해지려 하고, 우러러본다. 그러나 카포티에게는 예민하고 불안한, 본능적인 힘이 있었다. 착하고 아름답고 예쁜 이야기만 써도 충분할 상황에서 그는 1965년 '인 콜드 블러드'를 발표한다. 1959년, 캔자스에서 벌어진 일가족 살인사건을 파고들어 논픽션을 쓴 것이다.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 '카포티'에서, 그는 사건 소식을 듣고 자신이 취재하겠다며 직접 내려간다. 아메리카 원주민계인 범인을 만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다른 선택을 했다면, 내가 저 창살 안에 있을 수도 있었다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게이인 카포티는 늘 자신이 아웃사이더라고 생각했다. 가장 화려하고 즐거운 순간에도 내면에 남아 있는 근원적인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도 언제든 악을 행할 수 있다가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는 언제나 양면성이 존재하고 누구든 어떤 상황이 되면 어둠에 침윤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악마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윌러드와 아들인 아빈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지독한 삶의 기록이다. 전쟁이라는 지옥에서 돌아온 윌러드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지만 아내가 암에 걸린다. 독실한 신자인 윌러드의 어머니는 가족을 잃고 홀로 남은 헬렌이 며느리가 되기를 원했었다. 헬렌은 전도사인 로이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하고 딸 레노라를 낳는다. 여기까지만 보면 윌라드 일가의 힘겨운 생활 정도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끔찍한 선택을 하고야 만다. 윌러드는 전쟁에서 끔찍한 광경을 보았다. 일본군은 미군 포로를 십자가에 매달았다. 피부가 벗겨지고 피투성이가 된 그는 살아 있지만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미군들은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안겨줘야만 했다. 아내가 암에 걸렸을 때, 윌러드는 무엇이건 해야 했다. 그때 번뜩인 것은 희생이다. 누군가가 가장 아끼는 것 혹은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누구는 그것을 범죄라 부르겠지만, 윌러드는 지극히 순수했고 정당했다. 아빈이 아끼던 개를 죽이고, 십자가에 매달아 신에게 바친다. 영화에서는 여기까지만 나오지만 소설은 더 아래로 추락한다.
전쟁의 지옥은, 지금 이곳의 일상에서 재현된다. 설교를 하면서 수많은 거미들을 머리에 부었던 전도사 로이는 신에게 기도를 올리며 자신에게 고통을 준다. 그리고 자신에게 권능을 준 신에게 보답하기 위해 기적을 행할 것이라고 믿는다. 생명을 부활시키는 힘이 주어졌다고 믿은 로이는 헬렌을 살해한다. 광신을 탓하고 싶은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믿음에 사로잡혀, 목에서 피를 흘리며 숨이 끊어진 헬렌을 향해 부활하라고 외치는 로이의 모습은 그저 측은할 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어리석음과 약함이 원통할 뿐이다.
부모가 모두 죽고 혼자 남은 아빈을 할머니에게 인도한 사람은 보안관 보데커다. 뇌물을 받으며 범죄자와 공존하던 보데커는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기꺼이 살인을 한다. 보데커의 여동생 리는 남편 칼과 함께 히치하이커를 유혹하여 죽이고 사진을 찍는다. 리는 도망치고 싶으면서도, 동조한다. 칼은 아무런 죄책감, 죄의식 없이 사람을 죽인다. 리는 언제나 제자리에 머무를 뿐이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의 세상은 희망이 없고, 어떤 온기도 남아 있지 않다. 자신을 파괴하는 길로 질주하는 이들의 일상이 있을 뿐이다.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의 공간적 배경인 오하이오와 웨스트 버지니아는 미국의 중동부 지역이다. 이곳처럼 미국의 시골이라고 부를 만한 장소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더스틴 호프먼이 시골로 이주했다가 봉변을 당하는 영화 '어둠의 표적', 그리고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과 '브레이크다운'과 '원터스 본' 등에서 본 스산한 풍경이다. 환상 속으로 들어가자면 드라마 '트윈 픽스' 같은.
누군가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먼저 떠오르겠지만, 나에게 미국의 시골은 어딘가 황량하고 밤에는 절대 멈춰서고 싶지 않은 공간이다. 완고하고 배타적이며 폭력적인 공간.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를 보면서 다시 나의 편견을 확인했다. 그곳에 갈 일이 생기면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최대한 빨리 지나쳐 갈 것이다. 낯선 동양인이 환대받을 곳은 아니다.
도널드 레이 폴록이 평생 살아 왔고, 작품 세계에 영향을 끼쳤을 그곳은 진흙 속의 세계 같다. 곧게 세워져 있는 것 같지만 뒤틀린 질서에 사로잡혀 있고, 선명하게 보이지만 금방 몽롱하게 탁해져 버리는 기이한 세계.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를 처음 읽었을 때, 범죄소설이라기보다는 세태소설 같았다.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어지러운지 보여주는 괴상한 풍경화랄까.
영화는 그보다 단정하다. 여전히 불투명하지만, 그래도 선악이라는 척도가 어느 정도 주어져 있다. 소설을 읽을 때는 정말로 끈적끈적한 무엇인가가 몸에 달라붙는 것 같았다. 보고 나서 기억하기도 찝찝했다. 하지만 이번에 만들어진 영화를 보며, 소설을 떠올리며 착잡하다기보다는 뭔가 선명해졌다. 폴록의 세계에 살고 있는 인간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어서. 그들과 똑 닮은 인간들이 지금 이곳의 우리라는 것을 다시 느낄 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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