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연내 한국 개최를 추진 중인 한중일 정상회담에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의 참석 조건으로 강제징용 배상을 위해 압류된 일본 기업 자산을 현금화하지 않는다는 보증을 우리 정부에 요구했다고 한다. 스가 총리가 지난달 말 첫 한일 정상통화에서 한국이 "한일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릴 계기"를 만들어 달라며 양국 갈등의 책임을 전가한 태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를 정상회담 조건으로 삼은 것이다.
모처럼 일본 총리가 바뀌어 한일 관계에 숨통이 트일 수 있다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스가 총리가 "아베 정권 계승"을 공언했지만 실용주의 성향인 데다, 최근 코로나19로 단절되다시피한 양국 기업인 출입국이 완화되면서 그런 희망을 부추겼다. 일본 정부의 정상회담 조건 달기가 사실이라면 이런 기대감을 저버리는 것은 물론이고 정상 간 만남을 외교 협상의 카드로 쓰는 치졸한 외교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2008년 시작된 한중일 정상회담은 매년 개최가 목표이지만 그동안에도 이런저런 갈등으로 여러 차례 개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정상끼리 만나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어 대화가 재개되기를 반복했다. 과거사 갈등은 회담 주제가 될 수 있지만 그것만을 위해 만나는 것이 아닌데도 이를 정상회담 조건으로 앞세우는 건 이해할 수 없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라도 정상끼리 만나는 게 상식 아닌가. 일본기업 자산 매각은 우리 정부가 간섭할 수 없는 사법부 영역이라는 점을 모를리 없을 텐데 정부 보증 운운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일본이 징용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법을 요구해온 만큼 우리 정부도 좀 더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위한 국내의 입법 움직임 등을 설명하며 이해를 구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대화 자체를 회피해서 답을 구할 수 없다. 스가 총리는 "한일 양국은 동북아 평화와 안정을 위해 함께 책임을 갖고 전제조건 없이 정상이 흉금을 터놓고 회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관방장관 시절 자신의 발언을 되새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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