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헌법불합치 후속 입법 내용 중
주수 차등 제한·의사 진료거부권 등?
일부 비현실적... 여성 건강권 침해 우려
지난해 4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라 7일 정부가 마련한 형법ㆍ모자보건법 개정안이 실제 시행될 경우 적지 않은 혼란을 불러일으킬 전망이다. 이번 개정안에 담긴 △주수(週數) 제한 △의사의 진료거부권 명시 △임신 24주 이내 사회경제적 사유와 숙려기간 도입 등 내용이 일부 비현실적이거나 여성의 건강권을 해치는 원인이 될 수 있어 일찌감치 논란이 일고 있다.
주수제한, ‘명확성의 법칙’ 위배 논란
가장 큰 논란 거리는 형법 개정안에서 임신한 여성의 임신유지ㆍ출산여부에 관한 결정 가능기간을 마지막 생리 시작일 기준 ‘14주’, ‘24주’ 등으로 차등 규정한 지점이다. 여성계는 "사람마다 생리일자가 불규칙하거나 몇 달씩 건너뛰는 경우도 많아 스스로도 정확한 생리일을 알기 어려운 경우가 빈번하다"고 반발하고 있다. 지난 8월 법무부 양성평등정책위원회도 임신중지(낙태) 전면 비범죄화를 촉구하며 주수 제한에 대해 “사람마다 신체적 조건과 상황이 달라 명확성의 법칙에 위배된다”고 부정적인 입장을 내기도 했다.
여성의 말과 초음파 검사로 주수를 판단하는 의료진도 곤혹스럽긴 마찬가지다. 김재연 대한산부인과의사회 회장은 “생리일과 초음파 검사를 통한 태아의 크기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환자들이 생리일을 거짓으로 이야기하면 15, 16주까지는 의사들이 확인할 방법이 없기에 명확성의 원칙에 부합하기 어렵다”며 “태아의 머리, 다리 등 신체 부위마다 주수도 다르기에 ‘14주’라는 기준으로 모든 처분이 극명하게 갈리는 것은 현실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의사가 진료 거부 때 다시 상담기관으로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의사의 개인 신념에 따른 진료 거부권을 인정한 모자보건법 개정안 제14조의3도 논쟁적이다. 의료법에는 의료진의 진료거부 금지의무조항이 있지만 인공임신중절 진료에 대해서만 예외적으로 진료 거부를 인정한 것이다. 김 회장은 “종교적 이유로 인공임신중지 시술을 거부하는 의사들의 신념을 보호해달라는 의사회의 요구가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개정안에는 의사가 시술요청을 거부하면 인공임신중절 시술이 가능한 병원 인계가 아닌, 상담기관으로 안내하도록 규정해 여성의 빠른 의료서비스 접근을 막는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는 “인공임신중절 진료거부권이 있는 다른 나라들은 진료를 거부한 의사가 반드시 실제로 인공임신중절 시술이 가능한 병원으로 여성을 안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인공임신중절 시술을 하는 의사들에 대한 정보제공 방법을 고민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진료 거부권만 넣는다는 것은 여성을 병원과 상담기관으로 핑퐁한다는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사회경제적’ 이유라면 상담 후 24시간 지나야
형법 개정안에는 임신 24주 내에 낙태가 가능한 사유 중 하나로 ‘임신의 지속이 사회적 또는 경제적 이유로 임신한 여성을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하거나 처하게 할 우려가 있는 경우’라는 조항이 신설됐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사유’는 지난해 4월 헌재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당시 결정문에서 △학업이나 직장생활 등 사회활동에 지장이 있을 것에 대한 우려 △소득이 충분하지 않거나 불안정한 경우 △자녀가 이미 있어서 더 이상의 자녀를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는 경우 △상대 남성과 교제를 지속할 생각이 없거나 결혼 계획이 없는 경우 △혼인이 사실상 파탄에 이른 상태에서 배우자의 아이를 임신했음을 알게 된 경우 △결혼하지 않은 미성년자가 원치 않은 임신을 한 경우 등이 예시로 제시된 바 있다.
이번 개정안에서는 위와 같은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을 시 보건소 등에 설치된 임신ㆍ출산 종합상담기관에서 상담을 받고, 상담사실확인서를 발급받도록 하고 있다. 확인서를 받은 후에는 하루(24시간)동안 숙려기간을 거친 뒤에야 병원을 방문할 수 있다. 여성계는 “이미 낙태 결정을 내리기까지 여성이 거친 충분한 숙려기간을 감안하지 않고 의료서비스 접근성만 떨어뜨리는 조치”라고 비판한다.
나영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모낙폐) 공동집행위원장은 “임신 24주에 임박한 여성이 사회경제적 이유로 임신중지를 원할 경우 상담을 받고, 하루를 기다린 후 병원을 갔을 때 의사가 진료를 거부해 다시 상담기관으로 되돌아가 상담을 받는 과정을 거치는 사이 24주가 지나 처벌대상에 포함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임신 24주 이후에도 여성과 태아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데, 이때 인공임신중절 진료는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여부도 이번 정부안에는 빠져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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