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정적 생활 버리고…北 고위층, 한국행 결심한 결정적 이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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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적 생활 버리고…北 고위층, 한국행 결심한 결정적 이유들

입력
2020.10.07 16:44
수정
2020.10.07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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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80년대 전투기 몰고 온 북한 공군 많아
1990년대부터 북한 고위급 인사들 망명 잇따라

청와대는 7일 조성길 전 주(駐)이탈리아 북한 대사대리의 한국 거주 사실이 뒤늦게 공개된 것에 대해 공식 입장을 자제하면서도 파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분위기다. 사진은 2018년 11월 돌연 자취를 감춘 북한 조성길 전 이탈리아 대사대리. (줄리아 폼필리 트위터) 뉴스1

2018년 11월 이탈리아에서 망명을 요청하며 잠적했던 조성길 전 이탈리아 주재 북한 대사 대리가 지난해부터 한국에 머물고 있는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12년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이후 북한 대사급 외교관의 첫 남한행이라는 점에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요. 대사급 인사의 남한행은 1997년 장승길 이집트 주재 북한 대사가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22년 만입니다.

국내로 들어온 탈북민 수가 3만명을 넘은지도 4년이 지났습니다. 2016년 11월 통일부는 "누적 탈북민 수가 3만5,000명이 됐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1999년 1,000명, 2007년 1만명, 2010년 2만명을 넘어선 뒤 6년 만입니다. 지난 70년 동안 누가, 어떻게, 왜 분단선을 넘어 한국 땅을 밟았을까요. 한번 70년 한국 귀순사를 함께 알아볼까요.

1950~1980년대 초, 북한 공군들 전투기 몰고 남한행

1983년 2월26일 한국일보 지면


1950~1980년대에만 해도 한국으로 귀순한 이들은 대부분 북한 공군 군인들이었습니다. 우선 가장 처음 한국 귀순을 택한 인물은 1950년 4월 28일 김해비행장에 IL10기로 착륙, 귀순한 이건순 중위(당시 24세)입니다. 6ㆍ25 한국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이죠.

1953년 9월 21일에는 노금석 북한 공군 조종사가 미그 15기에 백기를 달고 김해 공항에 착륙했습니다. 노씨가 몰고온 미그 15기는 당시 최초로 철의 장막을 뚫고 자유 세계에 귀순한 소련신예기로 일컬어졌습니다.

1955년 6월 21일에는 야크 18 훈련기의 조종사와 항법사인 이인선ㆍ이운용이 서울 여의도 공항에 착륙, 귀순했는데요. 조종사인 이운용(당시 24세)씨는 이날 평양 문수리 비행장을 이륙, 목적지인 초도 상공에서 기수를 남쪽으로 돌린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북한 정규 장교가 아닌 북한 조종학교 학생이 귀순한 사례도 있습니다. 1960년 8월 2일 미그 15기를 타고 단독 이착륙 비행 연습을 하던 정낙현(당시 24세)씨는 "기체가 고장"이라며 갑자기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귀순했었습니다.

1970년 12월 3일에는 소좌이던 박순국(당시 33세)씨가 미그 15기를 몰고 강원 고성군 앞 바닷가 모래밭에 불시착했습니다. 박씨는 평안북도 남시의 항공기 수리창에서 미그기 1대를 인수, 완산으로 돌아오라는 지시를 받고 돌아가는 척하다 지상 통제를 피해 한국으로 귀순했죠.

1983년 2월 26일 미그19기를 끌고온 조종사 이웅평씨의 기자회견 모습.


1983년 2월 25일 귀순한 이웅평(당시 29세) 대위는 또 다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습니다. 1945년 해방 후 세대로, 바깥 세계나 자유의 맛을 체험해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귀순해왔기 때문이죠. 1981년 4월 대위로 진급한 후 이듬해 북한의 국기훈장 3급을 받는 등 북한 내에서는 일류급 평가를 받는 조종사였던 그가 왜 남한행을 선택했을까요.

공군 조종사로 일하던 그는 1981년 리비아ㆍ수단ㆍ이집트 등 중동에 파견되었다가 귀국한 동료 비행사들로부터 "외국 비행사들은 승용차ㆍTVㆍ냉장고 등을 소유하고 잘 산다"는 것을 전해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반면 북한 비행사들은 담배나 술까지 제한받는 등 먹는 것까지 걱정해야 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달아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5명부터 11명까지…대가족 이끌고 한국 땅 밟아

북한주민 11명 집단 망명. 1987년 1월 22일 한국일보 지면

1987년에는 최초의 가족 귀순 사례가 나왔습니다. 1987년 1월 20일 오전 6시10분쯤 가족 등 11명이 탄 북한어선 청진호가 일본 후쿠이현 미쿠니항에 접근, 망명을 요청한 것이죠. 청진호에는 선장 김만철(당시 49세)씨를 포함한 남자 4명과 여자 3명, 어린이 4명(남녀 각 2명) 등 모두 11명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김씨의 가족과 처가 쪽 가족들로, 나이는 13~68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최초의 민간인 가족의 한국 망명은 6ㆍ25 전쟁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김씨가 북한의 청진종합병원 의사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또 한번 사람들은 또 한번 깜짝 놀랐죠.

북한 내 일반노동자 평균 급여보다 2~3배 정도 많이 받는 등 좋은 환경에서 살아왔음에도 김씨는 "급료가 적고 생활이 어려워 수 년전부터 망명을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의사들에게는 소련 등으로 유학, 인민의사 칭호 등 몇 가지 특전이 있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의사들이 특권 의식을 갖지 못하도록 사상 교육을 받게 한 점이 이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던 것 같습니다.

7년 뒤 또다른 가족 귀순이 나왔습니다. 1994년 3월 18일 북한 사회안전부 대위 출신인 여만철(당시 48세)씨의 가족 5명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을 거쳐 30일 한국 땅을 밟았습니다. 당시 여씨는 귀순 동기를 두고 "1989년 6월 사회안전부 대위 근무 당시 뇌물 문제로 강제 제대 당한 후 사회적으로 고립되던 중 1993년 식량 배급까지 중단되면서 먹을 것을 찾아 귀순하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여씨의 탈출 과정은 영화 속 장면처럼 긴박했습니다. 여씨는 3월 14일 딸과 큰아들을 먼저 압록강 부근 혜산의 사촌누이 집에 보낸 후, 강물이 단단히 얼어있는지 알아보게 했습니다. 강물이 얼어있다는 것을 '조카가 결혼한다'는 암호로 담은 전보를 받은 여씨는 남은 식구들과 경비가 허술한 틈을 타 강을 건넜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고위급 인사 귀순에 남북 모두 충격

북한 사회안전부 전 간부(중앙당 연락부 간부) 망명. 1988년 5월 3일 한국일보 지면

1980년대 후반부터는 고위급 인사들의 한국행이 시작됐습니다. 시작은 1988년 5월 1일 서울에 도착한 김정민(당시 45세)씨입니다. 사회안전부 소속 간부이자 북한 외교관 여권을 소지했던 김씨는 유럽 여행 중 모국 주재 한국대사관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 태국을 거쳐 한국에 입국했습니다.

외교관 여권을 소지한 북한의 전직 공안 당국 관리가 망명한 것은 이 때가 처음입니다. 특히나 김씨는 북한의 대남공작 총괄부서인 '중앙당연락부' 소속의 현직 고위간부로 알려져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심지어 해외 여행 중에도 대남공작임무를 수행 중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는데요.

1991년 5월에는 북한의 콩고 주재 대사관 1등서기관(참사관 대우)있던 북한 외교관 고영환(당시 38세)씨가 귀순했습니다. 고씨는 외국 원수나 고위 사절단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영접과 통역을 맡은 인물로, 김영남 전 외교부장의 측근인 '엘리트 외교관'으로 밝혀졌습니다. 평양외국어학원ㆍ평양외국어대 불문과를 나와 북한에서는 드문 '불어통'이기도 하죠. 주자이르북한대사관ㆍ주몽골대사관참사관으로도 일했습니다.

고씨는 "해외 공관원에 대한 감시가 심해지고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북한의 모순된 체제에 염증을 느껴서 (남한에) 왔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당시 북한의 경제 사정에 대해 "북한의 공장 가동률은 30% 쯤"이라고 털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1996년 1월 14일 한국일보에 따르면 잠비아 주재 북한대사관 3등 서기관 현성일(당시 37세)씨의 부인 최수봉(당시 36세)씨가 한국대사관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외교관의 부인이 귀순 의사를 밝힌 것은 이번이 처음이죠.

북한사회과학원의 금속부문 부원장을 지낸 최흥수의 딸로 밝혀진 최씨는 김일성종합대 어문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우리 관계 당국에 평소에도 북한사회에 대해 심한 회의를 갖고 있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1차 탈출에 실패했던 현씨도 같은달 30일 아내의 뒤를 이어 귀순에 성공했습니다.

'김정일 은사'부터 최고위급 외교관까지 남으로

북 황장엽 망명, 귀순 의미와 남북관계 전망. 1997년 2월 13일 한국일보 지면

이듬해인 1997년 2월에는 황장엽 북한 노동당 국제담당비서가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황씨는 이전의 엘리트 간부급 인사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권력 서열 19위의 최고위급 인사였습니다. 황씨는 수령ㆍ당ㆍ인민의 삼위일체를 주창한 '주체사상'과 김정일의 권력 세습을 정당화한 '후계자론'을 확립한 북한 최고의 이론가이자 김정일의 은사였습니다.

그의 망명을 두고 당시 남한의 정보 당국은 "북한 체제에 사상적 기반을 마련했던 노 거물 이론가가 스스로 그 뿌리를 부정한 것으로, 북한 주체사상의 자기부정과 몰락을 의미한다"고 해석했습니다. 당시 황씨는 "고민끝에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문제를 협의하고 싶은 심정에서 남쪽 인사들과 협의해 보기로 결심했다"며 '학자적 고뇌'를 나타냈죠. 그러면서도 "당국은 나의 사상이 통치 체계에 맞지 않는다며 공격을 개시했다. 나는 정치에서 실패한 사람"이라고 거듭 밝히며 망명은 '권력투쟁 희생의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8월에는 장승길 이집트 주재 북한대사 부부가 한국에 망명했습니다. 장씨는 북한 외교부에서 부부장(차관급)을 지낸만큼 당시 북한 체제를 탈출한 외교관 중에서 최고위급에 해당됩니다. 더욱이 현직 대사가 망명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죠. 장씨는 북한 외교부의 핵심 자리를 거친 북의 실세 외교관이라는 평가를 받아왔습니다.

2016년 8월 발생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의 가족 귀순은 또 한번 대한민국을 뒤흔들었습니다. 장승길 대사 이후 귀순한 최고위급 북한 외교관이기 때문이죠. 당시 태 전 공사 가족은 영국 공군기를 타고 독일을 거쳐 끝내 한국에 왔습니다.

이후 2019년의 조성길 전 대사대리의 귀순까지. 70년의 귀순 역사 참 길고 다사다난합니다. 앞으로 귀순 역사는 또 어떻게 변화할까요? 남북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그때 그뉴스'였습니다.

손성원 기자
박서영 데이터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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