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쓰리' 마라토너 최종 목표는 '원더풀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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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쓰리' 마라토너 최종 목표는 '원더풀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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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13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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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미화원 마라톤 동호인 이연숙씨


환경미화원 일을 하면서 마라톤 동호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연숙씨가 마라톤 기록증서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김광원 기자


"저보다 12살이나 더 많은 언니에게 진다는 건 용납할 수 없었어요. 너무 분해서 눈물이 났죠."

이연숙(50)씨는 대구경북 마라톤 동호인들 사이에서 '최후의 여성 서브쓰리(Sub-3)'로 통한다. 이씨가 2014년 서울국제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59분3초를 기록한 이후로 지금까지 지역 동호인 중에 여성 서브쓰리를 성공한 동호인이 없다. 이씨는 "나를 키운 건 8할이 58개띠 언니와의 경쟁"이라고 밝혔다.

58년 개띠 언니를 처음 만난 것은 2007년이었다. 개띠 언니는 "준비, 땅!"하고 나면 어디론가 사라졌다. 14살이나 더 많은 언니가 꽁지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리 달린다는 사실에 승부욕이 발동했다. 5년 가량 훈련에 매진하자 엇비슷한 정도까지 따라잡았지만, 승부를 뒤집는 건 어림도 않았다. 2013년, 철치부심하고 참여한 5,000미터 시합에서 3초 차이로 졌다. 너무 분해서 집에 와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그리고 새벽까지 훈련일지를 펴놓고 패인을 분석했다.

"막판 스퍼트 때문이었어요. 언니가 3바퀴를 남겨놓고 탁, 치고 나가더라고요. 그리곤 끝까지 따라잡을 수 없었어요. 이 부분을 파고들자 싶었죠."

스퍼트 훈련에 딱 좋은 곳은 산이었다. 일주일에 한번씩 보통 사람들이 끙끙대며 오르는 가파른 산을 뛰어다녔다. 산을 몇 바퀴나 돌면서 뛰어다니자 등산하던 사람들이 "아줌마 왜 이러세요" 하면서 훈련을 말릴 정도였다. 숨이 턱에 닿고 장기까지 아파왔지만 참고 뛰었다. 힘이 다 빠진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을 내려면 그런 고통을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3년 11월, 울산에서 개띠 언니를 다시 만났다. 마라톤 코스 막바지에 구름다리가 있었다. 마지막 400미터를 남겨놓고 속도를 높인 후 결승선까지 내리 달렸다. 50미터 차이로 이겼다. 첫 승리였다. 개띠 언니의 남편이 "우리 집사람이 오늘 몸이 좀 안 좋았다"면서 승리를 깎아내렸지만, 이겼다는 게 중요했다. 그렇게 한번 잡은 승세를 줄곧 놓치지 않았다.

문경새재에서 꼭 한번 다시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 거의 동시에 들어왔는데, 이씨가 가슴을 쭉 내밀었다. 결승점에 처진 띠가 가슴에 닿는 느낌이 났지만, 언니의 남편이 "14살 많은 언니한테 양보 좀 해라"는 말에 바람에 트로피를 내줬다. 이후에는 한 번도 우승 단상을 내준 적이 없었다.

서브쓰리 외에도 16회 부산마라톤에서 1등을 했고, 합천 벚꽃마라톤대회 3연패, 청송산악마라톤대회 5연패를 달성했다. 이 역시 이씨가 마라톤 동호인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대상이 된 이유다.


최근 두류공원에서 회원들과 함께 훈련하는 모습. 맨 앞에서 달리는 이가 이연숙씨다.


예산윤봉길마라톤10킬로 2위를 차지한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철인3종 경기 뛰며 정수기 홍보

"야, 집에 있는 구슬 다 들고 나와!"

이씨는 어릴 때부터 승부욕이 강했다.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도 지기 싫어했다. 혹시라도 구슬이나 딱지를 잃으면 밤새 연습해서 다음 날 아침 일찍 어제 패배를 안겨준 친구의 집에 쳐들어가서 대결을 청했다. 심지어 닭싸움을 할 때도 남자아이들에게 밀리지 않을 정도로 근성이 남달랐다.

사실 이씨에게 가장 큰 도전은 삶 자체였다. 11살에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제까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대화를 나누었던 어머니가 말 한 마디 남기지 않고 갑자기 떠나버린 것이었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술에 의지해 살았고 수입도 변변찮았다. 돈을 안 벌면 굶어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씨는 그때부터 고사리손으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웃의 어린아이를 돌봐주거나 타작이나 호미로 콩밭을 매주고 품삯을 받았다. 여름에는 강가로 가서 다슬기를 잡아서 시장에 팔기도 했다. 초등학생 나이에 어린 동생에 술 취한 아버지까지 돌보다 보니 늘 꾀죄죄했다. 도시락은 늘 쉰내가 나는 김치 반찬에 맨밥이었다.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였고 단짝 친구를 가져본 적도 없었다.

"졸업식 때 꽃다발도 없이 운동장에 서서 교장선생님의 축사를 들으면서 생각했죠. '지금은 이렇게 초라하지만 30년 뒤에는 누구보다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 엄마 없이 자란 사람이란 말은 죽어도 안 듣겠다.' 제 인생에서 가장 길고 힘든 승부를 선언한 거였죠."

그러나 이씨를 버티게 한 건 먼 미래에 대한 포부보다는 당장의 승부욕이었다. 무슨 일을 하든 남보다 잘 안 되면 '저 사람은 하는데 왜 나는 안 되지?' 하는 생각으로 죽자 살자 매달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통경기술'을 익혀야 기술직으로 인정을 받았는데, 다들 학원에 갔다. 동생과 함께 자취하면서 먹고살기도 빠듯했던 탓에 학원은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공장을 직접 찾아서 아는 기술자 언니에게 잠깐 코치를 받은 뒤 그가 작업하던 자리에 앉아 독학으로 기술을 터득했다.

어렵사리 20대를 건너고 번듯한 사업가를 만나 결혼에 성공했지만 해피엔딩은커녕 본격적인 고생길이 열렸다. 남편의 회사는 결혼 전부터 이미 기울고 있었고, 앞길이 막막해서 임신한 몸으로 시댁의 자두밭에서 자두를 따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다. 남편은 첫 사업을 정리한 뒤로도 두 번이나 사기를 당해 빚잔치를 했다. 다행히 2009년 남편이 숙소를 제공하는 직장을 구해 10년 넘게 버텨낼 수 있었다. 결혼식장에서 꿈꾸었던 장밋빛 결혼생활은 모두 남들 이야기였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에서 벗어났던 시절이 없었어요. 아이들이 어릴 땐 옥탑방에 살면서 1층에 있는 장갑공장에서 장갑을 묶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우유 배달도 했죠. 장갑 묶는 일과 우유 배달은 쏠쏠한 수입이긴 했어도 재미가 없었어요. 힘든 것보다 지루했죠. 그래서 정말 힘들었어요."

2008년에 시작한 정수기 코디네이터 일은 특별한 의미에서 넘치도록 재미있었다. '승부욕'을 자극하는 상대를 만난 까닭이었다. 같은 일을 하는 회사 언니였다. 회사에서 한 달에 10명씩 신규 가입자를 만들라고 요구했는데, 그 언니는 10명을 훌쩍 넘어 매달 20명씩 가입자를 데리고 왔다.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잘 되지 않아서 언니의 수첩을 컨닝했다. 비결은 예전에 가입자로 있다고 끊은 사람들을 전화로 접촉해 재방문 하는 것이었다. 그대로 따라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회사 언니가 가진 특유의 친화력을 따라잡기는 힘들었다.

그때 취미생활을 일에 적용해보자 싶었다. 이씨는 2003년부터 수영을 시작했는데, 수영장에서 만난 철인3종경기 동호인의 권유로 마라톤과 사이클에 입문해 동호인 경기에 종종 출전하고 있었다. 촬영팀이 오는 철인3종경기에서 정수기 회사 홍보를 해보자 싶었다. 50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자전거, 슈트, 헬멧을 비롯해 정수기 상호를 새긴 유니폼을 맞췄다. 없는 형편에 전재산을 투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승부를 위해서라면 돈이 아깝지 않았다.

"방송이 나간 뒤에 철인3종경기에 참가한 철인 정수기 아줌마로 유명해졌어요. 그 뒤로 조금씩 전화가 걸려오더군요. 회사 언니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 자존심이 금 안 갈 정도로는 성공했어요."

이씨에게 찾아온 가장 뜨거운 승부 중의 하나는 환경미화원 시험이었다. 2010년 지인에게 시험 정보를 얻은 후 10달 동안 시험을 준비했다. 체력 테스트가 관건이라는 말에 합격 여부를 떠나 마라톤 동호인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체력에서 만큼은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10월 시험을 앞두고 1월부터 훈련이 들어갔다.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서 헬스장에서 역기를 메고 스쿼트를 100개씩 했다. 윗몸일으키기도 100개씩 채웠다. 그렇게 10달을 훈련하고 시험장에 가보니 환경미화원 3명을 뽑는데 100명이 와있었다.

"훈련한 대로 체력 테스트에 임했더니 만점이 나오더군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합격할 정도만 하면 되지 뭘 만점씩이나 받을 정도로 훈련했냐'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합격증을 받은 3명이 모두 만점이었어요. 조금만 방심했어도 패배의 쓴잔을 마실 뻔한 아슬아슬한 승부였던 거죠, 하하!"


2012년 청송산악 마라톤 대회에서 하프 부문 우승을 차지했다.


인생은 마라톤처럼

이씨는 마라톤을 잠시 쉬고 있다. 2019년 7월에 갑작스레 고관절 부상이 찾아왔다. 마라톤은 조깅으로 대체하고 요리라는 새로운 취미를 만들었다. 지인들을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는 일이 많아졌다. 며칠 전 새로운 요리를 선보이는 자리에서 마라톤 동호회 후배에게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들었다.

"이연숙이 너 진짜 훌륭한 사람이다! 멋있다."

음식 맛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구청에 수백만 원이 넘는 돈을 장학금을 기부한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면서 듣게 된 칭찬이었다. 마라톤 상금을 구청에서 운영하는 장학재단에 꼬박꼬박 기부했다. 이씨는 "상금도 우승에 그토록 집착했던 요인 중의 하나였다"면서 "상금을 장학금으로 기부할 생각을 하면 더 힘이 났다"고 고백했다.

"중학교 때 버스비 100원이 없어서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매일 걸어다녔어요. 남편이 진 빚 다 갚고 나서 여유가 생긴 뒤로 기부를 시작했어요. 정수기 코디네이터도 힘들긴 했지만, 숨이 턱턱 막힐 만큼은 아니었거든요. 저처럼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아이에게 후원해주고 싶은 마음 하나뿐이었어요."

다음 목표는 봉사활동이다. 어떤 봉사를 할지는 아직 구상 중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남들만큼 살면 남들보다 더 베풀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살아온 세월보다 살아갈 세월이 훨씬 길잖아요. ‘훌륭한 이연숙’이란 말을 계속 들으려면 더 열심히 살아야죠."

마라톤과의 인연도 계속 이어갈 계획이다. 부상이 회복되어도 전성기처럼 성적을 내지는 못하겠지만 계속 달리고 싶다고 했다. 또한 요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동안 터득한 마라톤 노하우를 전수하겠다고 밝혔다.

"마라톤만 한 운동이 없어요. 달리는 때만큼은 세상을 다 잊을 수 있거든요. 세상을 잊고, 사람들을 잊고, 인생을 모두 잊고 달리게 되잖아요. 저는 인생을 마라톤처럼 살았던 것 같아요. 당장의 승부에 몰입해 깜깜한 현실을 잠시라도 잊고 살았던 거죠."

그의 마라톤 철학은 여느 학자의 사상이나 논리만큼이나 유장하고 빈틈이 없었다.

"마라톤처럼 제 마음을 빼앗은 작은 승부들이 없었다면 저는 옛날 생각이나 눈앞의 어려움에 갇혀서 하루종일 한숨에 신세타령만 했을 거예요. 불쑥불쑥 발동하는 승부욕으로 세상 다 잊고 승부에 몰입한 덕에 현실의 난관을 하나씩 극복해나갈 수 있었어요. 나를 파괴하지 못하는 고통들은 역설적으로 삶을 헤쳐나가게 하는 힘이 되어주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2시간의 승부인 마라톤은 삶의 고통을 극복하는 비결을 가르치는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몇 시간만 참고 뛰면 결승점이 다가오듯이 어려운 일도 힘든 시간만 잘 넘기면 말 그대로 한 고비가 넘어가거든요. 제가 살아보니 그렇더군요."


이연숙씨는 "마라톤은 삶의 고통을 극복하는 비결을 가르치는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고백했다.


오유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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