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대학로 블루칩’ 극작가 겸 연출가 오세혁이 공간, 사람, 사물 등을 키워드로 무대 뒤 이야기를 격주 월요일자에 들려드립니다.
사이 [명사] 1. 한곳에서 다른 곳까지, 또는 한 물체에서 다른 물체까지의 거리나 공간. 2. 한때로부터 다른 때까지의 동안. 3. 어떤 일에 들이는 시간적인 여유나 겨를.
일주일간 집에서 홀로 멈춰 있었다. 진행 중인 연습과 준비 중인 연습이 동시에 중단되었다. 공연을 위한 행동이 멈추니 모든 행동이 멈췄다. 삶이 그동안 참 단순했다. 홀로 있으니 말하는 시간이 줄어들었다. 말을 하고 싶어서 동료들과 매일 통화를 했다.
A는 홍보 시작 하루 전날 공연을 취소했다. B는 첫 공연만 올린 후 극장 문을 닫았다. C는 생애 첫 오디션에 합격한 후, 아직까지 연습을 시작하지 못했다. 공연과 알바가 동시에 멈춘 D, 처음으로 제작하는 공연이 자꾸만 연기되고 있는 E, 예정된 공연의 개막 여부를 논의하는 동안 계속 기다려야 하는 F. 중단되었지만 끝난 것은 아닌, 중지했지만 마지막은 아닌, 끝과 시작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시작을 기다리는 사람들.
모든 연극은 시간이 정해져 있다. 연극 속 세월이 아무리 길어도 약속된 시간 안에 이야기를 끝내야 한다. 그 귀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 위해 어떤 말과 행동으로 무대를 채울지 끝없이 고민한다. 그 귀한 말과 행동을 스스로 멈추는 순간이 있다. 하나의 말에서 또 다른 말로 이어지기 직전의 침묵. 작은 행동에서 큰 행동으로 나아가기 직전의 정적. 말과 행동이 멈추고 생각이 흐르는 시간. 희곡에서 ‘사이’라는 단 한 단어로 표현되는 시간.
그 단어에는 시간이 적혀 있지 않다. 얼마만큼의 침묵과 정적으로 시간을 버텨내야 하는지 정확한 숫자로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그 시간은 늘 달라진다. 대본을 읽어낸 시간에 따라서, 대화를 나눈 시간에 따라서, 고민과 갈등의 시간에 따라서, 그날의 연습을 마친 배우가 잠시 현실의 삶을 살다가 돌아온 다음날의 시간에 따라서.
하나의 ‘사이’를 버텨내기 위해 쌓이는 수많은 시간. 그 시간 동안 쌓이는 무수한 ‘생각’. 그 생각의 시간을 거친 배우는 사이의 시간이 찾아와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말과 행동이 사라지고 정적과 침묵이 찾아와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침묵을 이겨낼 한 마디의 말을, 정적을 넘어설 하나의 행동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
A는 홍보 시작 하루 전날 공연을 취소했지만, 이미 내년 공연을 기획 중이다. B는 첫 공연만 올린 후 극장 문을 닫았지만, 그 시간 동안 마지막 장면을 수정했다. C는 생애 첫 오디션에 합격한 후 아직까지 연습을 시작하지 못했지만, 생애 처음으로 희곡을 쓰고 있다. 공연과 알바가 동시에 멈춘 D를 위해 몇 명의 동료가 각출하여 함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제작하는 공연이 자꾸만 연되고 있는 E는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꾸준히 리허설을 하고 있으며, 많은 지인들이 스스로 리허설을 보러 와서 모니터를 해주고 있다. 예정된 공연의 개막 여부를 논의하는 동안 계속 기다려야 하는 F는 여러 노력 끝에 새로 모집하는 공연아카데미에 합격했다.
다시 불이 켜질 극장을 기다리며, 무대의 삶을 잠시 멈춘 사람들. 무대에서 흘러갈 ‘사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삶의 ‘사이’를 버텨내는 사람들. 멈췄지만 끝난 것은 아닌, 중단되었지만 마지막은 아닌, 끝과 시작의 경계에서 오늘도 끊임없이 쌓이고 있을 무수한 생각들을 상상한다. 그 쌓인 생각들이 침묵과 정적을 이겨낼 하나의 말과 하나의 행동으로 탄생하는 순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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