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안보 당국자들은 브리핑에서 취재진과 자주 부딪힌다. 현안에 대해 당국자들이 “확인된 바 없다”거나 “이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같은 텅 빈 답변을 할 때 특히 그렇다. 그러나 '입 조심'을 하는 건 외교안보 당국자들의 숙명이다. 단어 하나가 외교 분쟁으로, 문장 한 줄이 안보 손실로 번질 수 있어서다. ‘외교적 화법'은 고위 당국자일수록 필수 자질로 꼽힌다.
25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 출석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외교적 화법의 책무'를 잠시 잊은 듯 보였다. '한국 외교관의 뉴질랜드 대사관 직원 성추행 사건'에 대해 강 장관은 피해자나 뉴질랜드 정부에 사과할 뜻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깜짝 놀란 이상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다시 물었다. 강 장관은 단호했다. “외교부 장관으로서 다른 나라에 사죄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피해자가 한 이야기에 신빙성이 얼마나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진실 규명이 먼저'라는 건 모든 사건에 해당하는 상식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외교를 총괄하는 장관이라면 '상식'도 때로는 '외교적으로' 언급해야 한다. "사과할 수 없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된 강 장관의 발언은 외신을 타고 뉴질랜드에 곧바로 전해졌다. 피해자 측에선 "역겹다"는 반응이 나왔다.
강 장관은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선 “죄송하다”고 했다. 지난달 문 대통령과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의 전화통화에서 성추행 사건이 불쑥 거론되게 한 것에 대한 사죄였다.
한국인이 뉴질랜드 외교관에게 성추행을 당한 사건이 있다고 치자. 뉴질랜드 외교부 장관이 공개 석상에서 "한국이나 피해자에게 사과하지 않겠다"고 버틴다면, "우리 총리님께는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인다면, 우리는 용납할 수 있을까.
외교부는 가해자인 현직 외교관에게 2018년 이미 감봉 1개월의 징계를 내렸다. 성추행 혐의를 인정해 징계를 하고도 외교부가 피해자의 '신빙성'을 따지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강 장관이 '신빙성'을 입에 올린 것은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들을 괴롭히는 '2차 가해'를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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