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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최근 얻은 일자리도 잘렸죠. 이제 이 판을 떠나려고 합니다.” 그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참모였다. 2011년 비서진에 합류하면서 정치권에 발을 디뎠다. 이후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여권 중진 의원의 보좌진으로도 발탁됐다. 그런 그는 지금 백수다. 21대 국회 들어 두세 군데 의원실에 지원했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어렵사리 여권 유력 정치인의 참모로 일하게 됐지만, 월요일에 출근했다가 목요일에 직을 내놓아야 했다.
□ 그는 ‘안희정 성폭력 사건’ 피해자 김지은씨를 처음으로 “돕겠다”고 한 동료다. 김씨는 그를 ‘첫 조력자 문 선배’라고 표현했다. 다수가 김씨를 방관하거나 심지어 음해할 때 그는 법적 투쟁까지 함께 했다. 그래서다.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그를 기용하지 않거나, 해고할 때 사유는 모두 비슷했다. “안 전 지사와 가까운 의원이나 인사들이 당신을 극렬하게 싫어 한다. 우리도 정치하려면 그런 분위기를 무시할 수만은 없다.”
□ 안 전 지사의 다른 비서진 A씨. 그는 김씨의 ‘미투’ 직후 온라인에 비방 댓글들을 달았다. 또 다른 측근 B씨는 김씨가 자신을 ‘오빠’라고 부르며 보낸 문자메시지가 마치 안 전 지사와 나눈 대화인양 퍼지는 걸 묵인했다. 재판에선 피고에 유리한 증언을 했다. 이들은 ‘안희정계’ 전ㆍ현직 의원의 보좌진으로 채용됐다. 김씨는 본보 인터뷰에서 “위증이나 2차 가해를 하는 동료의 모습은 충격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영전’했다. 반면 나를 도운 이들은 외압에 시달렸다. 그걸 보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웠다”고 말했다.
□ 연구원이었던 문씨가 행로를 돌린 건 세상을 바꾸는 가장 빠른 방법이 정치라고 믿어서다. 그는 “(피해자를 돕는 동안) 많은 게 바뀌었고 그 변화에 조력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9년을 바친 경력이 무용지물 될 위기지만, 그는 “소신에는 대가가 따르지 않겠느냐”며 씁쓸하게 웃었다. 이건 부당한 결말 아닌가. 방조자의 미래와 조력자의 미래가 뒤바뀐 것 아니냔 말이다. ‘안희정 사건’이, ‘박원순 사건’을 비롯해 다른 권력형 성범죄의 미래가 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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