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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 꿇은 아베’를 보는 불편함

입력
2020.07.27 22:0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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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위안부 운동의 목표는 용서와 화해다. 일본의 진심 어린 반성과 사죄가 앞서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반성과 사죄가 더디다고, 이를 촉구하는 행동이 야유나 경멸을 담은 위협적 방식이어선 안된다. 이는 피해자의 존엄성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가해자보다 정신적 우위에 서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용서가 완성된다. 용서할 주체가 옹졸함, 조급함, 저열함 같은 정신적 태도의 소유자로 전락할 때, 용서는 진정한 인간성 회복이 아니라 공격적인 한풀이로 변질되고 만다.

소녀상 앞에서 아베총리가 무릎 꿇고 사죄하는 조형물을 강원도 민간 식물원에서 곧 공개한다고 한다. 조형물의 이름은 ‘영원한 속죄’. 작명은 소설가 조정래가 했단다. 이 조형물을 미리 보는 마음은 무척 불편하다. 일본의 ‘영원한 속죄’가 아니라, 일본 전체를 타자화한 ‘영원한 조롱’만 느껴질 뿐이다. 이 조형물이 보복적 쾌감을 잠시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대신 우리 사회의 옹졸함을 들킨 것만 같아 당혹스럽다.

아베를 무릎 꿇리는 순간, 우리의 정신적 품위가 훼손된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감정인가. 일본의 퇴행적 역사의식을 질타하는 방식이 좀 더 의연할 수는 없는가. 방식이 나쁘면, 거기 담긴 메시지가 아무리 옳더라도 오염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조형물이 말하는 용서의 메시지가 수평적이 아니라 권위적, 위계적인 게 더 문제다. 피해 소녀는 앉아서 내려다보고, 가해자는 굴욕적으로 엎드려 있다. 가학성마저 얼핏 비치는 이 장면이 용서와 화해의 이상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굴복을 강제하는 이런 일방적 장면을 이상화하는 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풍요로운 주체성을 해치는 일이다. 그리고 할머니들을 단순히 감정적 시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일본내 양심 세력들에게까지 불쾌함을 줄지도 모른다.

이용수 할머니가 지적했듯, 위안부 운동이 증오와 상처를 주는 방식이어선 안된다. 대결적, 보복적 응징이 아닌 진심을 주고받는 용서와 화해여야 한다. 이는 인류사적 목표이기도 하다. 우리가 품위를 잃으면 운동의 보편적 가치가 희석되고 표적이 흐려진다. 미셸 오바마의 말대로, 저들이 저급하게 나오더라도 우리는 우아하게 가야 하는 이유다.

일본 대사관 앞에 설치한 소녀상 역시 같은 맥락에서 오랫동안 불편했다. 전근대적 순결 이데올로기를 형상화한 듯한, 단발머리 소녀상의 투박한 역사적 서사는 둘째 문제다. 조형물을 굳이 남의 나라 공관 앞에 설치한 것은 일본에 대한 공격적이고 보복적 메시지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일본 입장에선 다분히 경멸과 모욕의 신호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역사적 피해를 등가적 보복으로 구제하려고 할 때, 한국과 일본 국민이 함께 서야 할 미래의 자리는 극도로 좁아진다. 우리의 목표는 일본에 굴욕감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고, 불행했던 한 시대의 폭력성을 반성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해 훼손된 존엄을 되찾아주고, 가해자의 인간성이 온전히 회복된 미래의 시간을 앞당기는 것이다.

용서와 화해의 길이 멀더라도 우리는 정중함을 잃지 말고 끝까지 인내해야 한다. 그게 모두가 함께 이기는 길이다. 역사의 부관참시로는 미래의 시간을 약속할 수 없다. 인간 속에 숨은 ‘적대의 시간’을 깨우고, 퇴행의 그림자만 끌고 올 뿐이다.



이주엽 작사가, JNH뮤직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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