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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부러워한 노예의 딸

입력
2020.07.22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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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렉터 이야기(7.22)


1912년 '벼락 부자'가 된 10세 소녀 사라 렉터 .wikipedia.org

1912년 '벼락 부자'가 된 10세 소녀 사라 렉터 .wikipedia.org


1910년대 미국 사회는 1907년 오클라호마주의 연방 가입 사실보다 그 주의 흑인 소녀 사라 렉터(Sarah Rector, 1902.3.3~ 1967.7.22)의 운명에 더 주목했다. 해방 노예(자유민)지만 크리크 인디언 부족의 일을 도우며 생계를 잇던 부모에게서 태어나, 학교도 못 다닌 10대 소녀가 하루 아침에 벼락부자가 돼서였다. 연방정부의 1872년 ‘일반토지할당법(General Allotment Act)’ 덕분이었다.

오클라호마주는 남북전쟁을 치르고도 40년 넘게 오클라호마 준주와 인디언 준주로 나뉘어 있었다. 연방에 가입하려면 통합해야 했고, 먼저 준주의 물적, 문화적 경계를 허물어야 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인디언 부족 공유 토지 전통이었고, 땅을 쪼개 개인에게 소유권을 할당하자는 게 연방 상원의원 H.L 도스의 구상이었다. 그 법이 ‘도스법(The Dawes Act)’이라 불리는 일반토지할당법이었다. 사라 렉터의 가족들도 인디언에 준해 빈 땅을 받았다. 사라의 몫은 집에서 근 100km나 떨어진, 농사도 못 짓는 땅 160에이커(당시 시가 556달러)였다. 일가엔 농사도 못 짓고, 법에 묶여 팔수도 없는 땅이 짐이었다. 연간 30달러 토지 재산세를 감당할 일이 벅찼다.

사라의 아버지가 1911년 한 유정회사에 사라의 땅을 임대한 것도 세금 부담 때문이었다. 그런데 2년 뒤 거기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됐고, 렉터는 매일 약 300달러(근년 기준 7,000~8000달러), 연 10만달러가 넘는 수익을 얻게 됐다.

그 사실이 미국 전역에 알려지면서, 숱한 화제를 낳았다. 후견인 등의 재산 갈취 풍문이 돌아 인권단체가 개입했고, 어린 소녀를 향한 구애와 청혼도 잇따랐다. 만 18세가 되던 해 100만달러(현재 기준 1,100만달러) 갑부가 된 영리한 사라는 주식과 채권, 부동산을 소유하며 식당을 운영했고, 대공황 와중에도 호사를 누렸으며, 두 차례 결혼했고, 만 65년을 살았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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