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한국일보>
작년 이맘때쯤 닭을 와인에 졸여 요리한 ‘코코뱅’ 칼럼을 썼다. 여름이니 만큼 삼복더위를 겨냥한 시즌 특집이었던 셈이다. 올해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다. 게다가 코로나19가 유행하고 있으니, 건강해지기 위해서라도 몸보신 복달임 음식은 필수 아니겠는가.
닭 요리는 이미 소개했으니, 어쩌면 닭보다 먼저일지도 모를 달걀을 재료로 한 요리를 써 보려 한다. 명색이 와인 칼럼이니 응당 와인과 관련한 달걀 요리, 아니 요리라기보다는 간식이나 디저트로 안성맞춤인 음식을 소개하겠다. 바로 달걀노른자로 만든 ‘카늘레’(Cannele de Bordeaux)다. 복달임 음식을 먹은 뒤 디저트로 곁들이면 좋을 듯하다.
필자는 몇 년 전 프랑스를 여행할 때 카늘레를 처음 먹어봤다. 일찍이 고종황제의 식탁에도 올랐으며, 국내에 있는 디저트 카페 같은 곳엔 꽤 오래전부터 메뉴에 오른 음식이지만, 필자가 와인 공부를 하기 전까지 카늘레를 몰랐다.
보르도 지방의 와인을 공부할 때였다. 와인과 더불어 보르도의 특산물로 바로 카늘레를 꼽았다. 게다가 와인을 만들다 탄생했다 하니 그 맛이 무척 궁금했는데, 수년 전 현지에서 그 맛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니 이 칼럼의 소재로 제대로인 셈이다.
카늘레는 사실 필자의 기준으로 보자면 과자에 가깝다. 만드는 방법은 이렇다. 주름 열두 개가 국화잎 모양으로 피어난 황동으로 만든 과자 틀의 안쪽을 밀납으로 코팅한다. 과자 반죽을 틀에 붓는다. 겉은 까맣고 단단하지만 속은 부드럽고 연한 달걀노른자색으로 구워낸다. 그러면 부드러운 질감에 고소함과 달콤함이 어우러진 카늘레가 완성된다. 만드는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 ‘카늘레’는 그 모양을 보면 ‘주름’이라는 뜻이 있는 이름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카늘레의 유래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15~18세기 프랑스 보르도에 있는 아농시아드 수도회의 수녀들이 달걀흰자로 와인을 정제하고 남은 달걀노른자로 만들었다는 설이다. 와인 양조 과정에서 탄생했으니, 역시 와인의 고장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 않는가.
당시 수도회에서는 자급자족도 하고, 내다 팔아 수도원 살림에도 보탤 겸 와인과 양초를 만들었다. 양초를 만들려면 밀랍이 필요했기 때문에 양봉도 했다고 한다. 꿀도 얻고 밀랍도 얻었으니 대단한 살림꾼들이다. 아무튼 수녀들은 녹여 놓은 밀랍을 과자틀에 부어 코팅한 뒤, 와인을 정제할 때 사용하고 남은 달걀노른자를 밀가루에 넣어 반죽해 틀에 넣고 구웠다. 이렇게 카늘레가 탄생했다.
한편, 다른 나라 영향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12~15세기에 보르도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다 보니 보르도의 음식도 자연스레 영국 디저트인 머핀과 푸딩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영향으로 카늘레를 만들었다는 설이다.
두 설 가운데 어느 것이 맞는지는 확실히 모른다. 둘 다 맞을 수도 있다. 다만 카늘레의 탄생에는 와인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분명한 것 같다. 이를 알려면 ‘와인을 정제하고 남은 달걀노른자’에 관한 이야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전에 잠시 다른 이야기부터 꺼내겠다. 인쇄에 관한 이야기다.
필자가 출판계에 입문했을 때만 해도 컴퓨터는 생소한 물건이었던지라, 조판에서부터 인쇄까지의 과정이 지금처럼 데스크톱 퍼블리싱 시스템이 아니었다. 당시 책을 만드는 과정은 이랬다.
책 원고를 가로 사이즈와 줄 간격만 조절해 쭉 전산 식자(植字)한다. 두루마리 형태로 책 내용이 인화되어 출력된 인화지를 한 페이지씩 칼로 잘라 큰 모눈종이 도화지 위에 붙인다(이 바닥종이를 대지라 부르고 이렇게 하는 것을 조판이라 했다). 이를 제판소에 가져가 제판용 카메라로 촬영한다. 그러면 까만 글자는 투명하게, 흰 바탕은 까맣게 된 필름이 생긴다. 마치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인화된 필름에는 피사체의 어두운 부분은 투명하게 밝은 부분은 검게 반전되어 찍히는 것과 같다.
제판용 카메라로 촬영한 네거티브 필름을 난백(卵白)판으로 만들어, 인쇄기에 걸고 인쇄해 묶으면 책이 된다.
난백판은 말 그대로 달걀흰자질과 중크롬산 암모늄을 물에 녹여서 만든 감광액을 써서 만든 인쇄판이다. 필자는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당시 제판실 팀장님은 자기 소싯적엔 난백판을 만들 때 필요한 달걀흰자를 수거하러 다녔다고 말하곤 했다. 재미있게도 네거티브 필름에는 은이 함유되어 있어 가끔 절판된 책의 필름을 팔면 회식비로 톡톡히 쓰이기도 했다.
난백판을 사용하기 전에는 ‘활판’이란 것으로 인쇄했다. 필자는 활판이 사라지기 직전 출판계에 입문한 터라 운 좋게도 활판으로도 책을 한 권 만들어 봤다. 1980년대 중반에서 늦게는 1990년대 초까지 만들어진 책은 활판으로 인쇄했는데, 지금도 필자의 책꽂이에는 활판으로 인쇄된 책이 적잖게 있다.
활판 인쇄 과정은 이렇다. 한 면(쪽)에 해당하는 사이즈의 사각형 틀에 납으로 만든 활자를 하나하나 핀셋으로 뽑아 활자틀을 채운다(조판). 조판을 마친 판에 딱딱한 종이를 놓고 ‘프레스’기로 눌러 찍어 활자 모양이 새겨진 종이, 즉 지형을 만든 후 인쇄판을 만들어 인쇄한다.
활판으로 인쇄한 책은 글자 모양의 오톨도톨한 질감을 글자 모양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손가락 끝으로 글자를 한 줄 한 줄 짚어가며 책을 읽을 때 느낄 수 있던 ‘생각의 질감’을 요즘의 인쇄 방식으로는 느낄 수 없어 아쉽다.
아무튼 왜 인쇄 이야기를 하냐면, 난백판의 ‘난백’이 바로 달걀흰자를 뜻하거니와 인쇄 과정의 ‘프레스’라는 단어가 와인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달걀흰자 이야기를 풀어 보자.
달걀흰자는 레드와인 양조 과정에서 등장한다. 레드와인은 적포도를 으깨어 통에 넣고 그대로 발효시킨다. 껍질에서 레드와인의 중요한 요소인 색, 향, 타닌 등의 성분을 충분히 우려내야 하므로 발효가 끝날 때까지 포도즙, 껍질, 씨앗 등이 발효통 속에 뒤섞여 있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껍질과 씨앗 등 찌꺼기와 포도즙을 분리한다.
발효를 마친 포도즙만을 숙성통으로 옮겨 그대로 놔두면 부유물이 저절로 가라앉는다. 그러면 위의 맑은 액만을 따라낸다. 이를 말 그대로 ‘따라내기’ 과정(Racking, Soutirage)이라 한다. 따라내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야 맑은 와인을 얻을 수 있다. 그럼에도 미세한 부유물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때 달걀흰자를 와인에 넣는다. 그러면 타닌이나 산과 같은 미세물질이 달걀흰자의 단백질 성분과 엉켜 붙어 덩어리져 가라앉는다. 이 과정을 거치면 더 맑은 와인을 얻을 수 있다.
이 방식은 보르도 지방에서 맑은 레드와인을 만들기 위해 사용한 정제법이다. 일반적으로 레드와인에는 달걀흰자를 주로 사용하고, 화이트와인에는 물고기 부레를 사용했다. 요즘에는 간편한 재료를 쓰기도 하지만, 달걀흰자를 고급 레드와인 정제에 여전히 사용한다.
달걀흰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채식주의자는 와인을 꺼리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달걀흰자를 사용한 정제 과정을 생략하여 만든 비건용 와인도 시중에서 구할 수 있다.
이렇듯 레드와인을 맑게 하기 위해 달걀흰자를 많이 사용하다 보니 당연하게도 달걀노른자가 남아 있었다. 이 달걀노른자로 만든 과자가 바로 카늘레다.
그러면, 도대체 인쇄 과정에 등장한 두 번째 단어, ‘프레스’는 무슨 관련이 있을까. 오늘날 프레스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출판, 신문, 잡지 등 인쇄 매체는 물론이고 인쇄 기계를 뜻하기도 하고, 기자나 더 나아가 언론계를 칭하기도 한다. 이처럼 인쇄매체의 역사에 등장한 이 중요한 단어를 와인의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놀랍게도 프레스는 와인 양조에서 비롯한 말이다. 때는 다시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수사들은 수도원에서 주로 성경을 필사하고 와인을 만들며 올리브오일을 짰다. 여러 일 가운데 특히 일일이 성경을 필사하는 작업은 그야말로 중노동이었다. 그런데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한 뒤 필사 노동이 획기적으로 바뀐다. 수사 한 명이 필사해 한 번에 한 권만 만들 수 있었던 성경이 대량 복제가 가능한 매스미디어로 거듭났으니 말이다.
구텐베르크는 기존의 목판 인쇄의 단점을 보완해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금속활자로 조판한 판을 인쇄기에 놓고 기계로 ‘압착’해 종이에 계속해서 찍어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바로 인쇄기다. 아무리 금속활자판이 있다고 해도 판을 눌러 인쇄할 수 있는 기계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바로 이 인쇄기를, 수도원에서 와인을 만들기 위해 포도의 즙을 짜는 기계인 ‘프레스’의 원리를 이용해 만들었다고 한다(올리브오일도 프레스기로 추출했다).
그러고 보면 인쇄술은 어느 날 하루아침에 뚝딱 발명한 게 아니라, 와인 양조 기술이 그 바탕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결국 ‘프레스’는 수사들이 힘들게 작업했던 와인 만들기, 올리브오일 짜기, 성경 필사 세 가지 모두를 획기적으로 바꾼 기계인 셈이다.
‘출판’과 ‘와인’이 결국 별개가 아니라니! 필자로서는 출판인이자 와인 애호가 입장에서 뭔가 ‘숙명’인 듯 ‘팔자’인 듯 느껴져 짜릿하기까지 하다. 이 기분 좋은 짜릿함을 만끽하자면 카늘레에 보르도산 레드와인을 곁들여야 한다. 그런데 먹어 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달콤한 카늘레에는 드라이한 레드와인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커피나 차가 더 낫다는 게 함정. 그러니 따로 먹을 수밖에.
그러면 흰자로 정제한 와인을 먼저 먹을까 노른자로 만든 카늘레를 먼저 먹을까. 어릴 때부터 달걀을 두고 시작된 흰자와 노른자의 갈등은 끝나지 않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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