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와 추모를 앞세운 여권 일각의 ‘박원순 옹호’가 도를 넘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고(故) 박원순 시장이 연루된 의혹에 공식 사과했지만, 민주당 의원들의 문제적 발언은 거듭됐다. 박 전 시장의 극단적 행보를 “미투 처리의 전범(典範)"이라고 치켜 세우기까지 했다.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서조차 ‘우리당 젠더 감수성은 바닥’이라는 한탄이 짙다.
민주당 소속 광역지방단체장의 잇단 성추문으로 조성된 위기를 현재 수준의 인권 감수성으로 돌파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여당을 짓누르고 있다. 그나마 민주당 여성 의원 전원이 14일 박 시장 의혹 사건의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성명을 내 여권의 태도 변화를 기대하는 여론에 호응했다.
박 시장 측근 의원들의 위험한 발언
박 시장 재임 시절 서울시 행정부시장을 지낸 윤준병 민주당 의원은 ‘가짜 미투’ 논란을 촉발했다. 그는 13일 페이스북에 “미투 고소 진위에 대한 정치권 논란과 그 과정에서 피해자 2차 가해를 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박 시장이 죽음으로서 답한 것”이라고 썼다. 그러면서 “고인은 죽음으로 당신이 그리던 '미투 처리 전범'을 몸소 실천했다”고 주장했다. 박 시장의 죽음이 고소인 A씨를 위한 희생적 행위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박 시장이 유서 등에서 혐의를 언급하거나 A씨에게 사과한 바는 없다.
윤 의원은 A씨의 고소 내용 진위도 의심했다. 윤 의원은 “행정부시장으로 근무하면서 피해자를 보아왔고, 시장실 구조를 아는 입장에서 이해되지 않는 내용이 있었다”며 “'침실' '속옷' 등 언어의 상징 조작에 의한 오해 가능성에 대처하는 것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했다.
파문이 커지자 윤 의원은 언론에 화살을 돌렸다. 그는 14일 페이스북에서 “일부 언론에서 (제가) 가짜 미투 의혹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며 "가짜 뉴스 및 정치권의 공격과 논란으로 2차 피해가 없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자신의 글 자체가 2차 가해에 해당할 여지가 크다는 성찰은 없었다.
진성준 민주당 의원 역시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나와 A씨의 주장을 “사자 명예훼손에도 해당할 수 있는 얘기”라고 깎아 내리는가 하면, 서울특별시장(葬)에 대한 논란은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비판했다. 진 의원은 정무부시장으로서 박 시장과 함께 일했다.
민주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도가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왔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본보 통화에서 “박 시장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의원들의 인지적 혼란이 특히 심한 것 같다”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럴 분이 절대 아니야’라는 식의 대처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진실 마주할 용기 필요” 성찰 시작
박 시장 장례 기간엔 민주당에서 ‘진상 규명'이 금기였지만,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박용진 민주당 의원은 14일 KBS 라디오 ‘김경래의 최강시사’에 나와 “당 차원의 진상 파악과 대책 마련이 있어야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특히 안희정·오거돈 사태에 이어 국민들의 실망이 적지 않은데, 당의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하지 않았는지, 선출직 공직자들에 대한 성평등 교육이 형식적인 수준에 그쳤던 것은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전날 김해영 최고위원이 “향후 당 소속 고위공직자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당 차원의 깊은 성찰과 대책이 필요할 것”이라고 공식 사과 한데 이은 발언이다.
민주당 여성 의원들도 14일 성명서를 내고 "당사자의 인권 보호는 물론 재발 방지를 위해 서울시 차원의 진상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며 외부 인사가 참여하는 서울시 진상조사 및 재발 방지 대책위원회 구성을 촉구했다. 또 민주당 소속 자치단체장을 포함해 전체 지역위원회의 성비위 관련 긴급 일제 점검도 요구했다.
이들은 "피해 호소 여성이 느꼈을 고통에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며 "신상 털기와 비방, 모욕과 위협이 있었던 것에 대해 강한 유감를 표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잇따른 민주당 소속 광역단체장들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시정에 차질을 빚고 국민들께 큰 실망을 드린 데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했다. 남성 단체장들의 잘못을 여성 의원들이 대신 사과한 것이다.
당 일각에선 이해찬 대표가 정식으로 유감을 표명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해찬 대표는 13일 강훈식 수석대변인을 통해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된 것에 사과 드린다”는 입장을 전하는 것으로 입장 표명을 갈음했다.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복잡미묘한 상황에 놓인 민주당 의원들은 '추모와 진실 사이에서 균형을 찾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박원순계로 장례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을 지낸 박홍근 민주당 의원은 “고인의 공은 공대로 고인의 과는 과대로 껴안고 가겠다”는 말로 참담하고 복잡한 심경을 전했다. 그는 페이스북에 “고인이 남긴 그대로, 고인에게 배운 그대로 기억하고 계승하는 것은 이제 남은 자들의 몫”이라며 “그의 공적 업적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적 한계와 과오까지 있는 그대로 평가하고 성찰할 일”이라고 썼다.
진상 규명의 필요성에도 선을 긋지 않았다. 박 의원은 “고인이 홀연히 떠나면서 남긴 어려운 숙제가 많다”며 “특히 고인으로 인해 고통과 피해를 입었다는 고소인의 상처를 제대로 헤아리는 일은 급선무”라고 했다. 또 “사실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지만 생전에 가까이 소통했던 저로서는, 고소인께서 받으신 상처에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사과했다.
이수진(비례대표) 민주당 의원 역시 “추모의 마음은 제 가슴 속에 간직하겠다”며 “다시 일어서, 전쟁터 같은 폐허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도록 하겠다. 실체적 진실을 마주 볼 수 있는 용기를 저 자신에게 구한다”는 말로 씁쓸한 심경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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