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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18년 전 쓴 유언장 "부고 내지 말고 장례는 조용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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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18년 전 쓴 유언장 "부고 내지 말고 장례는 조용히"

입력
2020.07.10 10:46
수정
2020.07.10 13:23
0 0

자녀에 "유산 없어 미안, 돈·지위 이상 가치 깨닫길"
아내에겐 "변호사 부인이지만 고생,? 용서하길"

박원순 서울시장. 연합뉴스

박원순 서울시장. 연합뉴스

실종됐던 박원순 서울시장이 10일 숨진 채 발견되면서 18년 전 그가 과거 자녀와 아내, 지인들에게 남겼던 유언장이 다시금 눈길을 끌고 있다. 박 시장이 2002년 펴낸 책 '성공하는 사람들의 아름다운 습관…나눔'에는 그가 살아있을 때 쓴 유언장이 담겼다. 이 유언장은 '내 딸과 아들에게', '내 아내에게', '모든 가족과 지인들에게' 3장의 편지로 구성돼있다. 박 시장의 유언장에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함이 담겨 있었다. 

박 시장의 편지는 먼저 딸과 아들에 대한 사과로 시작한다. 박 시장은 "유산은 커녕 생전에도 너희의 양육과 교육에서 남들만큼 못한 점에 오히려 용서를 구한다"고 썼다. 이어 "그토록 원하는 걸 못 해준 경우도 적지 않았고 함께 가족 여행을 떠나거나 함께 모여 따뜻한 대화 한번 제대로 나누지 못한 점에서 이 세상 어느 부모보다 역할을 제대로 못한 점을 실토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평생 농촌에서 땅을 파서 농사를 짓고 소를 키워 나를 뒷바라지 해주신 내 부모님은 내게 정직함과 성실함을 무엇보다 큰 유산으로 남겨주셨다"며 "하지만 나는 너희에게 제대로 시간을 내지도 못 했고, 무언가 큰 가르침도 남기지 못 했으니 그저 미안하게 생각할 뿐"이라고 마음을 전했다.

그러면서 "다만 그래도 아빠가 세상 사람들에게 크게 죄를 짓거나 욕먹을 짓을 한 것은 아니니 그것으로나마 작은 위안을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라고 했다. 이어 "내 부모님의 선한 심성과 행동들이 아빠의 삶의 기반이 됐듯 내가 인생에서 이룬 작은 성취들과 그것을 가능하게 한 바른 생각들이 너희 삶에서도 작은 유산이 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박 시장은 또 "인생은 돈이나 지위만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최선을 다해 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며 "너희는 돈과 지위 이상의 커다란 이상과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 인생을 살기 바란다. 그런 점에서 아빠가 아무런 유산을 남기지 못하는 것을 오히려 큰 유산으로 생각해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서울시청 시장실 앞에 비치된 박원순 서울시장의 사진. 뉴스1

서울시청 시장실 앞에 비치된 박원순 서울시장의 사진. 뉴스1

박 시장은 아내에게 남긴 유언장에선 "평생 아내라는 말, 당신 또는 여보라는 말 한마디조차 쑥스러워 하지 못 했는데, 이제야 아내라고 써놓고 보니 내가 그동안 당신에게 참 잘못했다는 반성부터 앞서는구려"라고 전했다. 이어 "변호사 부인이면 누구나 누렸을 일상의 행복이나 평온 대신 인권 변호사와 시민 운동가로서의 거친 삶을 옆에서 지켜주느라 고됐을 당신에게 무슨 유언을 할 자격이 있겠냐"며 "오히려 유언장이라기보다는 내 참회문이라 해야 적당할 것"이라고 남겼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대해 아내에게 미안함을 풀어낸 박 시장은 "내가 당신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다면 몇 가지 또 처리해줘야 할 일이 있다"며 "내가 소중히 하던 책들, 이사할 때마다 당신을 고생시키며 모아온 그 책들은, 우리 아이들이 원하면 갖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어느 대학 도서관에 모두 기증해 주길 바란다"고 부탁했다.

또한 "이미 안구와 장기를 생명나눔실천회에 기부했으니 그분들에게 내 몸을 맡기도록 부탁한다"며 "그 다음 화장을 해서 시골 마을 내 부모님이 계신 산소 옆에 나를 뿌려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이어 "내 마지막을 지키러 오는 사람들에게 조의금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소", "내 부음조차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겠소, 신문에 내는 일일랑 절대로 하지 마오"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아울러 "어느 날 이 세상 인연이 다해 내 곁에 온다면 나는 언제나 당신을 기다리겠다"며 "그래서 우리 봄, 여름, 가을, 겨울 함께 이 생에서 다하지 못한 많은 시간을 함께 지냈으면 한다"는 바람을 담았다. 이어 "무책임한 남편이 끝까지 무책임한 말로써 이별하려 하니 이제 침묵하는 것이 좋겠다"며 "감히 다시 만나자고 할 염치조차 없지만 그래도 당신 때문에 내가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었으니 나로서야 또 만나자고 할 형편이다. 다만 이 모든 것을 용서해 달라"고 했다.

박 시장은 다른 가족과 지인들에게도 유언을 남겼다. 그는 "모든 분들에게 나는 큰 신세를 졌다. 많은 배움과 도움을 얻었다"며 "때로는 내 원만하지 못한 성격으로 상처를 입기도 했을 것이고 억지스러운 요구로 손실을 입기도 했을 것"이라고 썼다. 이어 "그래도 우리는 함께 꿈꿔오던 깨끗하고 인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고, 그 못 다한 몫은 바로 이제 여러분들이 이뤄줄 것임을 믿는다"고 남기기도 했다.

박 시장은 9일 오후 5시17분 딸이 '112에 아버지가 유언같은 말을 남기고 집을 나갔는데 연락이 두절됐다'는 취지로 실종 신고를 접수한 후, 7시간 만인 이날 오전 0시쯤 북악산 숙정문 인근에서 사망한채 발견됐다.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박 시장의 전 비서가 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고소장을 접수,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으나 그가 사망하면서 이 사건은 '공소권 없음'으로 종결될 전망이다.

이유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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