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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악가 지망생 꿈 앗아간 죽음의 무대

입력
2020.07.07 22:00
수정
2020.07.08 10:21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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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송희씨 페이스북 제공.

박송희씨 페이스북 제공.


성악가를 꿈꾸던 24세 대학원생, 이 꽃다운 청춘이 선망하던 공연장 무대는 비극적 죽음을 초래한 무덤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학자금을 벌기 위해 오페라 조연출을 자청할 때만해도 소중한 무대경험을 쌓을 수 있으리라 설레었겠죠. 말이 조연출이지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야 했어도 그래서 버텼을 것입니다. 공연이 코앞으로 다가와 모든 스태프들이 시간싸움에 허덕이고 있을 때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는 무대 세트의 페인트 도색작업이었습니다. 

어두컴컴한 무대 한 구석에서 그녀가 색칠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무대중앙이 돌연 지하로 가라앉아 버립니다. 다른 세트를 바삐 옮겨 싣기 위해 리프트를 내려야 했던 것이지요. 이때 무대의 하강을 알리는 경고음이나 경고등이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아래로 꺼진 무대를 구분할 만한 울타리 역시 부재했습니다. 도색작업의 경과를 확인하기 위해선 물리적 거리가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그녀가 뒷걸음으로 세트의 색감을 가늠하고 있을 때 싱크홀처럼 내려앉은 바닥이 그녀의 발꿈치를 맹렬히 빨아들입니다. 깊이는 7m, 아파트 3층 높이에 버금가는 추락이었습니다. 2018년 9월 10일, 성악가를 꿈꾸던 꽃다운 청춘 박송희양은 간과 폐가 파열될 만큼 치명적인 골절과 뇌출혈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사고 장소는 김천문화예술회관, 김천시의 관리감독을 받는 극장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법정에선 여전히 책임 공방을 다투는 중입니다. 해당기관은 무대감독 한 사람의 잘못으로 몰아가는 것도 모자라 피해자에게도 책임을 떠넘겨 왔습니다. 피해자의 실수에서 비롯된 피치 못할 비극이라는 것이지요. 김천시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무대감독이 작업을 그만하라 지시를 했는데도 피해자가 이를 무시했고, 리프트가 지하로 내려간 사실을 보고도 실수로 잊어버렸으며, 굳이 뒷걸음쳐 작업의 경과를 확인하지 않아도 될 만큼 공연장은 충분히 밝았다.’

1심 재판부는 김천시의 이 주장을 모두 기각했습니다. 공연장에 안전장치를 철저히 갖추었더라면, 작업 중이던 송희양에게 리프트가 내려가니 위험하다고 제대로 경고했더라면, 안전교육을 엄격히 실시했더라면 이 비극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란 이유였습니다. 법원은 김천시와 피해자의 책임을 8대 2로 산정했습니다. 하지만 시는 패소를 인정하지 않고 다시 원점에서 다퉈보겠다며 항소합니다. 불복의 이유는 이렇습니다. ‘안전교육을 실시한 공연 준비 첫날, 피해자가 현장에 없었던 것이지 안전교육 자체를 실시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안전교육을 누가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확인할 방도가 없으니 책임을 지기 어렵다.’ 유족이 받은 항소장엔 김천시를 대리한 정부법무공단이 법률 대응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유족이 마주한 것은 해당기관의 진정한 사과가 아니라 냉정한 행정절차뿐이었습니다. 

공연장의 무대는 늘 위험한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 사건에선 지하로 내려간 리프트가 문제였지만 천장에도 육중한 음향판과 조명장치가 즐비합니다. 과거에도 사망까지 이른 안전사고들이 일어났는데 이때 사상자는 무대장치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술 인력이 아닌 예술가들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무대 위 안전수칙을 요청하며 예술가들이 몸소 나섰습니다. 언제까지 예방도 보상도 책임도 없는 사고에 속수무책이어야 하는지 절박하게 호소합니다. 안전한 무대를 위한 이 사고 방지책에 예술가들은 ‘박송희 규정’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1천800명이 넘는 예술인들이 박송희 규정을 촉구하는 서명에 동참했습니다. 성악가를 꿈꾸던 꽃다운 청춘, 故 박송희양의 명복을 마음 깊이 기원합니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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