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 따라, 길 따라, 호수 따라...옛이야기 지줄대는 '향수'의 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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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따라, 길 따라, 호수 따라...옛이야기 지줄대는 '향수'의 시상

입력
2020.06.30 16:00
수정
2020.06.30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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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향수' 정지용의 고향 옥천구읍

정지용 시인의 고향 옥천구읍에서 언덕 하나를 넘으면 금강 줄기와 마주한다. 옥천선사유적지에서 강변 언덕을 따라 '향수호수길'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강 건너편에 대청댐 건설로 육지 속 섬이 된 오대리마을이 보인다. 


옥천 죽향초등학교 교정에 학교를 대표하는 세 인물의 기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독립운동가 김규흥(1872~1936) 기념비에는 흑백사진과 함께 1909년 지역 인재를 키우기 위해 사립 창명학교를 설립하고 목화밭을 학교 부지로 내놓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창명학교는 옥천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41년 죽향국민학교로 개칭했다. 시인 정지용(1902~1950) 기념비에는 그의 작품 ‘해바라기’가 새겨져 있다. ‘해바라기 씨를 심자 / 담모롱이 참새 눈 숨기고 / 해바라기 씨를 심자’. 단 세 줄만 읽어도 고스란히 그림으로 그려진다. 정지용은 이 학교 4회 졸업생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1925~1974) 휘호탑에는 ‘웃고 뛰놀자, 그리고 하늘을 보며 생각하고 푸른 내일의 꿈을 키우자’라는 어록이 새겨져 있다. 197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녔다면 그다지 어색하지 않은 ‘훈화 말씀’이다. 육영수는 1938년 이 학교 졸업생이다.  


옥천구읍은 누가 뭐래도 정지용의 고향, ‘향수’의 마을

새 도심이 형성되고 관청과 상권이 옮겨 가면 기존 도심은 ‘원도심’ 혹은 ‘구도심’으로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옥천은 조금 다르다. 경부선 철도가 완공되고 군청이 역 근처로 옮겨 간 후 기존 도심은 ‘옥천구읍’이 됐다. 1970년 완공된 경부고속도로는 ‘신읍’과 ‘구읍’ 사이를 관통해 경계가 한층 명확해졌다. 

단층 건물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옥천구읍 풍경. 정면의 낮은 산 언덕을 넘으면 금강이 나타난다. 


나지막한 단층 건물이 대부분인 옥천구읍은 제법 규모가 큰, 한가한 농촌마을 정도로 보인다. 그래도 오랜 세월 옥천의 중심이었다는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가장 상징적인 건물이 옥천향교다. 조선 태조 7년(1398)에 처음 지은 후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961년 복원했다. 공자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강학 공간인 명륜당, 유생들의 숙소인 동재ㆍ서재를 갖춘 것은 여느 향교와 차이가 없다. 다만 정문 누각처럼 지은 명륜당의 아궁이가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2층 방바닥에 매달려 있는 모양인데, 실제 불을 때도 화재의 위험이 없다는 게 신기하다. 향교가 있는 동네는 여전히 교동으로 옥천구읍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옥천향교는 옥천구읍이 지역의 중심이었다는 증거다. 향교가 있는 마을은 여전히 교동이다. 


옥천향교 명륜당의 공중에 뜬 아궁이. 건물 양쪽의 방바닥 밑에 매달려 있는 구조다. 


옥천구읍 중심에 있는 옥주사마소. 전국 3곳에 남은 사마소 중 유일하게 원래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옥천의 옛 지명을 딴 옥주사마소 역시 옥천의 역사를 보여주는 건물이다. 사마소는 조선시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지방 고을의 생원과 진사들이 모여 유학을 가르치고 정치를 논하던 곳이다. 효종 5년(1654)에 세워진 옥주사마소는 전국에 3곳 남은 사마소 중 유일하게 본래 자리에 남아 있는 사마소다. 송시열이 쓴 ‘의창중수기’에 의하면  원래 어려운 백성을 위해 곡식을 저장해 두던 의창건물을 뜯어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소박한 한옥에 불과하지만, 옥천 유림의 정신이 깃든 건물이다. 

교동마을 옥천향교 바로 옆에는 ‘육영수 생가’가 자리 잡고 있다. 사업가였던 그의 부친 육종관은 당시 충청도 전체에서 손꼽히는 부자였다. 1918년 일대의 산과 들을 사들여 13채 99칸 저택을 지었고 1925년 태어난 육영수 여사는 결혼하기 전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그러나 1974년 육 여사가 사망한 후에는 관리가 소홀해지고 폐가의 길을 걷는다. 1999년 유족들이 건물을 완전 철거하면서 ‘교동집’으로 불리던 저택은 기단과 초석만 남게 되었는데, 옥천군이 터를 사들여 2011년 복원했다. 안채 사랑채 별당 후원 등을 둘러보면 조선시대 상류층의 살림집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안채와 사랑채 툇마루에는 육 여사의 학창 시절과 결혼, 가족 사진 등이 전시돼 있다. 솟을대문 앞 논은 연꽃 연못으로 조성해 관람객이 함께 둘러볼 수 있도록 했다. 

옥천구읍의 육영수 생가. 옥천군이 부지를 매입해 99칸 저택으로 복원해 놓았다. 


육영수 생가가 위치한 교동마을 앞 논은 연꽃 연못으로 가꾸어 놓았다. 


유서 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옥천구읍은 누가 뭐래도 ‘향수’로 대표되는 정지용의 고향이다. 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실개천 옆에 초가로 복원한 정지용 생가가 있다. 당시 한약방이었던 생가는 실개천(지금은 석축으로 말끔하게 정비해 ‘실개천’이 주는 정감을 느끼기 어렵다)의 범람으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바로 옆은 정지용문학관이다. 건물로 들어서면 전시장 입구에 동그란 안경을 쓰고 검은 두루마기 차림의 청년 정지용이 벤치에 앉아 있다. 관람객이 기념사진을 찍는 일종의 포토존이다. 1929년 스물일곱 나이로 모교인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할 당시의 모습이다. 한복 입은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민족 말살에 서슬 퍼렇던 일제강점기였음을 감안하면 교사 신분으로 쉽지 않은 차림새다. 그는 휘문고보 재학 시절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어 무기정학 처분을 받기도 했다. 

옥천구읍을 관통하는 실개천 옆에 정지용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정지용문학관 로비에 두루마기 차림의 청년 정지용 인형이 앉아 있다. 관람객의 포토존이다. 


정지용문학관 내부는 그의 대표작 '향수' 전시관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서정성 짙은 사진과 시어로 꾸며 놓았다.

그토록 바라던 광복 이후에도 그는 오랫동안 불온한 인물로 취급받았다. 월북 시인이라는 누명으로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연구자들조차 이름을 그대로 쓰지 못하고 ‘정○○’ ‘정X용’으로 표기할 수 밖에 없었다. 옥천구읍에 그의 문학관이 들어서고 생가가 복원된 것도 뒤늦게나마 자진 월북이 아니라 납북됐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후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북한 당국에 의해 정인택 김기림 박영희 등과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용됐다가 평양의 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 또는 그 직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사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의 수많은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48년 짧은 생은 고난과 우여곡절로 얼룩졌지만 그의 작품은 가장 아름답고 한국적인 시어로 남아 있다. 전시관은 그의 대표작 ‘향수’에 대한 헌정 공간이나 마찬가지다. 사진과 함께 전시된 시어 하나하나가 그리운 추억으로 다가온다. 구읍 뒤편  교동저수지 주변은 ‘지용문학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정지용과  비슷한 정서를 표현한 여러 시인의 작품을 시비에 새겨 놓았고, 저수지 물위에도 그의 작품을 눈으로 보듯이 재현해 놓았다. 

옥천구읍 뒤편 교동저수지 주변은 '지용문학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그의 시를 시각적으로 재현해 놓았다.


옥천구읍은 누가 뭐래도 정지용의 고향이다. 담배 가게 처마에도 그의 시 한 수가 적혀 있다.


옥천구읍의 정지용 생가 주변 골목은 온통 그의 시 작품으로 장식돼 있다. 


정육점 외벽에도 정지용의 시가 적혀 있다. '얼룩백이 황소'가 이렇게 소비될 줄이야. 


구읍의 골목과 상가에도 정지용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다. ‘향수미용실’ 옆 고깃집에는 ‘얼룩백이 황소’ 그림이 손님을 부르고, 담배 가게 처마 밑도 그의 또 다른 작품 ‘오월소식’이 까치 그림과 함께 장식하고 있다. 담장과 골목마다 바다, 바람, 별똥, 춘설, 조약돌, 피리 등 서정 깊은 시어로 가득 찼으니 시인이 있는 마을은 얼마나 풍성한가.

도란도란 옛이야기 나누며 걷기 좋은 ‘향수호수길’

실제는 가난으로 힘들었을지라도 많은 이들에게 고향은 아름다움으로 추억된다. 집안이 어려워 16세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교비생(校費生)으로 학교를 다녔던 정지용에게도 옥천구읍은 차마 꿈에도 잊지 못할, 한없이 푸근한 곳이었다. 

옥천에는 그의 대표 시 ‘향수’에 나오는 것처럼 넓은 벌이 없다. 실개천도 예전 같지 않고, 얼룩빼기 황소는 눈을 씻고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성근 별이 박힌 하늘과 함초롬 이슬을 머금은 풀섶은 가까이 있다. 옥천구읍에서 동편으로 낮은 언덕을 넘으면 드넓은 금강 물줄기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대청호 상류이니 호수라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 물길 옆 산자락으로 ‘향수호수길’이 조성돼 있다. 도란도란 옛이야기 나누며 걷기 좋은 길이다. 

향수호수길 출발점인  옥천선사공원. 고인돌을 비롯해 대청호에 잠긴 마을에 있던 여러가지 석재 유물을 모아 놓았다. 


금강 대청호 주변 산자락을 따라 연결한 향수호수길. 목재 덱이 깔려 있어 비교적 편안한 숲길 산책로다. 


대청호 산자락을 따라 연결한 향수호수길. 산책로 바로 아래는 물에 잠기기 전 옥천에서 보은으로 가는 국도가 있었다. 


향수호수길에서 본 대청호 풍광. 바로 앞에 보이는 취수탑까지는 흙길이고, 나머지는 목재 덱으로 조성돼 있다. 


향수호수길 건너편 오대리는 대청댐 건설로 육지 속 섬이 된 마을이다.  


대청댐 건설로 섬이 된 오대리 마을 주민들이 도선에 차량을 싣고 나오고 있다. 


옥천선사공원에서 옛 취수탑이 있던 곳까지 2km는 폭신폭신한 흙길이고, 이후부터 3.6km는 대청호가 수직으로 내려다보이는 목재 산책로다. 전체 구간을 걷지 않아도 좋다. 강 언덕을 따라 난 오솔길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고, 강 맞은편에는 대청댐 건설로 섬이 된 오대리 마을이 보인다. 길은 한없이 좁지만 호수는 ‘전설 바다’처럼 넓고 푸르다. 다만 모래성 쌓던 금빛 백사장은 호수에 잠겨 흔적을 찾기 어렵다.  

옥천에선 산을 휘감는 금강 풍경이 어디서나 지척이다. 그중에서 요즘 뜨는 곳이 안남면 둔주봉이다. 정상(384m)까지 갈 것 없이 해발 275m 전망대에만 오르면 발아래에 물에 잠긴 한반도 지형이 보인다.  360도에 가깝게 휘휘 돌아가는 금강 상류의 전형적인 물길이다.  다만 서해와 동해가 바뀐 모습이어서 전망대 정자에 작은 거울을 달아 놓았다. 

안남면 둔주봉 전망대에서 보는 한반도 지형. 좌우가 바뀐 모양이어서 전망대 정자에 거울을 달아 놓았다. 


안남면사무소 앞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으면 전망대까지 약 2.3km, 1시간가량 걸린다. 안남면 뒤편 고갯마루까지 1.4km는 시멘트 포장된 도로지만 차량이 비켜가기 힘들 정도로 좁고 주차할 공간도 마땅치 않다. 수고를 줄이려다 낭패를 당할 수 있으니 면사무소에서 걷는 게 현명하다.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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