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파일럿 박경원(6.24)
국립여성사전시관이 2017년 7월 ‘경계를 넘은 여성들’을 테마로 기획전시를 하면서 ‘우리나라 최초 민간인 여성 비행사’로 박경원1897.6.24~ 1933.8.7)을 소개해 곤욕을 치렀다. 앞서 소개한 중국 윈난항공학교 출신 권기옥(1901~1988)이 박경원보다 1년 먼저 비행사가 됐다는 게 우선 문제였다.
하지만, 독립운동가 권기옥과 달리, 박경원은 일본제국비행협회에서 자격증을 따서 제국 홍보를 위해 비행했다는 점이 주된 발화점이었다. ‘일제의 기억’은 해방 7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녹슬지 않은 뇌관이다.
고(故) 장진영이 주연한 2005년 영화 ‘청연’도 같은 이유로 박대 당했다. ‘최초’도 아닌 친일파의 삶을 왜! 가장 순도 높은 민족 가치를 추구해온 ‘민족문제연구소’의 목청이 가장 컸지만, 수많은 이들이 열성으로 동조했다. ‘토착왜구’란 말이 생겨나기 전이었다.
한국학중앙연구소에 따르면, 박경원은 가구업자의 딸로 경북 대구에서 태어나 자혜의원 간호학교를 나와 간호사로 일했고,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가마다(鎌田) 비행학교 자동차부를 거쳐 일본비행학교 타치가와(立川)분교 조종과를 졸업, 1928년 3등 조종사 면허를, 이듬해 여성 최고 면허인 2등 면허를 획득했다. 1928년 5월엔 일본 비행경연대회에서 3위 입상했다. 그는 ‘경계를 넘은 여성’이었다.
1897년 고종은 타의로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다 1년만에 경운궁(덕수궁)으로 돌아왔고, 구겨진 체면을 펴자며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가 됐다. 조선은 이미 온전한 독립국이 아니었다. 11월 독립문이 건립됐다. 박경원이 그 해 태어났다.
개인의 삶은 우연에 크게 휘둘린다.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 어떤 환경에서 성장하고, 누구를 만나 어떤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삶은, 특히 유ㆍ청년기의 의식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권기옥이 고향 평양의 한 공장에서, 교회 소학교와 숭의여학교에서 듣고 배운 사회주의와 독립운동의 사상적 세례를 박경원은 누리지 못했다.
경상도에서 나고 자란 나는 대학 입학 전까지 1980년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고, 그 불민함이 모두 내 탓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하늘을 날고 싶어 일본을 선택한 박경원의 그늘이, 그 시절 20대 여성 파일럿 박경원의 값어치를 다 가릴 만큼 짙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21세기 한국인들의 난폭한 손가락질, 친일-항일의 이분법과 순결ㆍ순도의 병적인 집착이 나는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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