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묻는다. “원래 배우가 꿈이었어요?”
여자가 답한다. “아뇨, 피아노를 쳤었죠. 폴란드인은 걸음마보다 쇼팽을 먼저 배워요.”
이윽고 하얀 목욕가운 차림의 여자(마고ㆍ도리아 틸리에)가 새하얀 피아노 앞에 앉더니 길다란 손가락으로 쇼팽의 즉흥곡(Impromptu) 2번을 친다. 야상곡을 떠올리게 만드는 은은한 선율에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글리산도(건반을 미끄러지듯 연주) 음이 감미롭다.
지난달 20일 개봉한 프랑스 영화 ‘카페 벨에포크’의 한 장면이다. 영화는 ‘시간여행’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여느 타임슬립(Time Slip)과는 다르다. 시간여행 설계자가 고객이 가고 싶은 순간을 ‘손수’ 연출해 준다는 것. 1970년대 파리 풍경을 세트장으로 재현하고, 당시 옷차림을 한 배우들이 고객의 설정에 맞춰 연기를 하는 식이다. 영화 제목인 ‘벨 에포크(Belle Eépoque)’는 ‘아름다운 시절’이란 뜻으로, 주인공 빅토르(다니엘 오떼유)의 추억이 담긴 카페 이름이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상징한다.
마고는 과거를 연기하는 배우다. 극중 폴란드 출신으로 등장하는 그녀는 고객인 빅토르와 대화를 나누다 즉흥적으로 쇼팽의 곡을 친다. 즉흥곡은 이름 그대로 즉흥적인 악상이 특징이다. 쇼팽은 모두 4개의 즉흥곡을 남겼는데, 그중 2번은 대중에 상대적으로 생소한 편이다. 통상 쇼팽의 즉흥곡이라 하면 화려하고 빠른 기교가 인상적인 ‘즉흥환상곡(4번)’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황장원 클래식 평론가는 “즉흥곡 2번은 다른 즉흥곡들에 비해 선율이 소박한 편인데, 구성 면에선 야상곡과 발라드, 연습곡 등 특색을 두루 갖추고 있어 쇼팽이 표현하려 했던 순간의 감정들을 다채롭게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영화에서 즉흥곡 2번은 늙은 빅토르가 갖는 첫사랑에 대한 그리움, 변해버린 감정의 회의감, 젊은 시절의 설렘 등을 함축하는 장치로 보인다.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프레드릭 쇼팽(1810~1849년)은 폴란드인이다. 마고의 설명처럼 폴란드인에게 쇼팽이 각별한 이유다. 쇼팽의 기일(10월 17일) 즈음엔 피아노 콩쿠르 중 최고 권위의 ‘쇼팽 국제피아노콩쿠르’가 바르샤바에서 5년마다 열린다. 대회에선 오직 쇼팽의 곡만 연주된다. 5년 전 피아니스트 조성진이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대회로도 유명하다.
영화엔 프랑스 작곡가 쥘 마스네(1842~1912년)의 ‘명상곡(Meditation)’도 흘러 나온다. 중년의 남성 고객이 시간여행을 통해 자신의 작고한 아버지를 만나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에서다. 이 곡은 마스네가 만든 오페라 ‘타이스(Thais)’에 쓰인 간주곡이다. 눈을 감고 바이올린의 비브라토(음을 떨리게 하는 기교)를 듣고 있자면 별다른 설명 없이도 회상에 잠길 수밖에 없는 노래다.
장재진 기자 blan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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