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건 탈출 과정ㆍ행로 확인
옆집 라면ㆍ누룽지로 허기 채운 뒤
맨발로 야산 도망, 해질녘까지 기다려
맘카페선 ‘친모의 이중적 글’ 논란도
경남 창녕에서 계부와 친모의 학대를 피해 목숨을 건 A(9)양의 탈출 경로와 구체적인 과정이 새롭게 확인됐다. 지붕을 타고 옆집으로 탈출한 A양은 옆집에서 라면과 누룽지, 콜라로 허기를 채운 뒤 해질녘까지 야산에 숨어 있다 1㎞가 넘는 산길을 맨발로 걸어 한 주민과 편의점 주인에 의해 구조됐다. 편의점에서는 화상을 입어 퉁퉁 부은 손으로 1만4,000원어치의 음식을 20분만에 먹어 치웠다.
12일 A양이 살던 경남 창녕 대합면의 G빌라 앞에서 만난 C씨는 “(지난달 29일) 오전 10시쯤 사무실로 출근하니 테이블 위에 먹다 남은 컵짜파게티와 누룽지컵, 콜라가 놓여 있었다”며 “다른 직원이 먹었겠지 생각하고 화장실을 다녀오니 짜파게티컵이 사라지고 없었다”고 말했다. C씨의 사무실은 3명이 근무하는 주택형 사무실로, A양의 집과 계단을 공유한다. C씨는 사무실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C씨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랐는데 이번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알았다”며 “화장실 간 사이 어딘가 숨어있다 도망가는 길에도 컵라면을 가지고 간 것을 보면 배가 아주 고팠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누룽지는 절반 정도를 남겼다.
A양은 C씨 집(사무실)을 통해 빌라 밖으로 나온 뒤 왕복 2차로의 찻길을 건너 바로 앞 야산으로 숨어들었다. 이후 A양은 한 주민에게 발견되기 전까지 약 8시간 동안 산에 머물렀다.
G빌라에서 서쪽으로 700m 가량 떨어진 CU편의점 주인 김현석(31)씨는 “지난달 29일 6시 반쯤 A양이 동네 주민과 함께 손이 퉁퉁 부은 채 흙투성이 옷을 입고 왔다”며 “손이 왜 그렇느냐는 질문에 ‘아빠가 뜨거운 프라이팬에 지졌다’고 했다. 못 볼 정도로 끔찍했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이후 A양은 “아빠가 집을 나가면 지문을 지워야 한다면서 달궈진 프라이팬에 손을 지졌다”고 경찰에 말했다. 편의점은 야산 끝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G빌라에서 산을 타고 이동할 경우 거리는 1.5㎞ 가량이다.
또 김씨는 “A양이 도로를 따라 도망치다간 엄마 아빠 눈에 띌 것 같아서 산길을 따라 걸었고 산에서 도로로 나오자 한 아줌마를 만나 이곳에 왔다고 했다”며 “그 아픈 손으로 빵과 우유 소시지, 편의점 도시락 등 1만4,000원어치의 음식을 20분에 걸쳐 먹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통증이 심해 보여 A양에게 진통제도 줬다.
특히 김씨는 “자신을 데리고 온 주민이 (신고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자 A양은 극도의 불안감을 보였다”며 “아버지가 잡으러 올까 봐 아이가 먹는 동안 망을 봐줬다”고도 했다.
경찰에 따르면 A양은 자신의 집에서 탈출하기 전 이틀 가량 쇠사슬에 목이 묶이고 난간에 자물쇠가 채워진 채 감금됐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날 지역 맘카페에는 친모가 올린 것으로 소개된 글에서 이런 모습과 달리 자녀들에 대한 애정이 묻어나는 모습이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구사일생으로 계부와 친모의 학대에서 벗어난 A양은 전날 2주만에 병원에서 퇴원해 현재 아동쉼터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다. 경남 아동보호전문기관 관계자는 본보와의 통화에서 “아이가 병원에 있는 동안 ‘밥을 많이 먹어 배가 나온다’고 할 정도로 몸무게가 늘면서 영양실조 및 빈혈 증세는 사라졌다”며 “인형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등 심리적으로도 안정을 많이 되찾았다”고 말했다.
A양은 보호기관 상담사들에게 “학교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 사귀고 싶다”고도 했지만 “집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A양은 3학년까지 거제의 한 초등학교를 다니다 지난 1월 창녕으로 옮기면서 전학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입학과 등교가 미뤄지면서 친구들을 거의 사귀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A양의 거제 B초등학교 생활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B학교 교장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밝고 활발한 성격으로 교장실로 와서 수다도 떨다 가곤 하던 아이였다”며 “학예발표회에서는 풍물패 맨 앞줄에서 장구를 맡아 치고, 줄넘기도 잘해 상도 받았다”고 말했다. 교장은 지난 2018년 부임했으며, 전교생은 70명 수준이다.
A양 계부와 친모의 학교 행사 참석률은 저조했다. 매년 두 차례(3, 9월) 있는 교육과정 설명회에는 한 차례도 참석하지 않았다. 작년 10월 학부모 초청 공개수업에는 잠시 왔다가 담임교사와 별도 대화 없이 교실을 빠져나갔다. 교장은 "교육과정 설명회 학부모 참석률은 50% 정도 된다” 고 말했다.
부모의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A양의 학업성적은 수학을 제외한 나머지 과목들은 우수했다. 결석일수는 3년을 통틀어 3일이며 병결 2일(발열 1, 복통 1), 할머니 방문 1일이다. 교장은 “다른 어린이들보다 출석률도 높고 건강했다”며 “아버지와 성이 달라 학교에선 계부일 것으로 추측은 했지만, 가정에서 문제가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학교에서 생활을 잘했다”고 말했다.
창녕=권경훈 기자 werther@hankookilbo.com
거제=이동렬 기자 dylee@hankookilbo.com
전혼잎 기자 hoihoi@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