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록 ‘판문점의 협상가’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
“북한의 대남 자신감 결여가 극렬한 적대감 표출로 나왔다.” 10일 정세현(75)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이 내린 진단이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을 지낸 정 부의장은 그간 경험을 담은 회고록 ‘판문점의 협상가’(창비)를 내놨다. 이날 서울 마포구 창비서교빌딩의 기자간담회는 책 출간을 맞아 열렸다. 전날 북한은 대북 전단, 일명 ‘삐라’를 뿌리게 방치했다는 이유로 모든 대남 연락 채널을 차단했다. 자연스레 남북관계 경색이 화제로 떠올랐다.
정 부의장은 “4ㆍ27 판문점선언, 9ㆍ19 공동선언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은 데 대한 누적된 불만이 터져 나온 것이기도 하지만, 더 깊게 들어가면 내부의 자신감 결여”라 말했다. 이어 “(남측이) 삐라 뿌리는 걸 막지 않는다고 그렇게까지 화 내고 전면전으로 돌파해야 한다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는데, 남쪽이 잘해주려고 하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공포를 오히려 갖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북의 항의 이후에야 삐라 단속에 나선 것을 두고서도 “왜 김여정(노동당 제1부부장)에게 벌벌 기냐고 질책하는 대신 거꾸로 생각해야 한다”며 “북한이 터무니없이 자존심을 내세우고 화를 내는 건 열등 의식의 발로”라고 해석했다.
때문에 지금의 남북 연락 단절은 일시적 현상이라 봤다. 정 부의장은 “이명박 정부 때도 연락을 안 받다가 2018년 평창올림픽 때에야 참석과 특사 파견을 한번에 알려왔다”며 “이번에도 전화선을 가위로 자른 게 아니라 코드만 뽑아 놓은 것인 만큼 필요하면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 부의장은 그렇기에 오히려 우리 정부를 향해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충고했다. 특히 김연철 통일부장관에 대해선 “일반 공무원이 아니라 국무위원”이라며 “가시철망 사이로 길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나치게 경직된 한미 공조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미다.
올 들어 우리가 누차 가능성을 타진한 남북 협력을 북한이 거부한 데 대해 정 부의장은 북한 내부 사정이 그만큼 좋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했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어려움이 컸으리라고 짐작했다. 개학이 늦춰질 정도의 상황이면 공장이나 농장이 제대로 돌아갔을 리 없고, 생산성도 나빠졌으리라는 설명이다. 그는 “위기를 돌파할 동력을 만들어내야 하는데 (내부 결속을 위해 북한) 밖의 적이 필요한 것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정 부의장은 김여정 제1부부장이 사실상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후계자 자리를 굳힌 것으로 평가했다. ‘당 중앙’이라는 호칭이 근거다. ‘당 중앙’은 1974년 김일성 주석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공식 후계자로 지목할 당시 붙인 명칭이다. 당 창건 75주년(10월 10일)을 앞두고 성과를 내야 하는 경제 부문은 김 위원장이, 대남 업무는 김 제1부부장이 각각 챙기는 것으로 업무 분장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그는 추측했다.
통일에 대해서는 ‘남북 연합론’을 역설했다. “지금처럼 남북 간 경제력 격차가 큰 상황에서 살림을 합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며 “적어도 격차가 2대 1 수준이 될 때까지는 유럽연합 같은 연합 형태를 유지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했다.
정 부의장은 “회고록의 부제가 ‘북한과 마주한 40년’인데 실은 이보다 더 오래됐다”며 “끝도 시작도 없는 ‘통일의 미로’ 속을 걸어 왔고 지금도 걸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이태웅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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